블로고 사진 정리하는데
갑자기 보고 싶네
나에게 가장 값진 인생을 가르쳐 준
요즘 참 많이 보고싶은,

비파사나는 잘 하러 들어갔나.
나의 소중한 인연
유스케 어린이

나중에 서로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퇴임후에도 계속 괴롭히더니...ㅠㅠ
 노무현 전 대통령 2009년 5월 23일 서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나저나 권양숙 여사 불쌍해서 어째...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니더라도 즐기면서 일하는 멋진 인생을 사는 부러운 사람,
그리고 언제나 하고 싶은 말:shut up and just go


apa sherpa
진정한 산 사나이라고 누가 리플을 달아놨던데....
동의합니다
http://media.daum.net/foreign/all/view.html?cateid=1007&newsid=20090523105611047&p=seoul&RIGHT_TOPIC=R0


어제 워낭 소리 보다 컴퓨터 바로 앞에 켜놓고 자버렸는데(근데 왠 한국 영화가 몇마디 빼곤 다 못알아 듣겠네--)
아침부터 엠에센 띠리링 연속,
래이챌.

아, 세월 참 빠르다. 벌써 12학년이라니 ㅠㅠ
난 얘랑 같이 학교를 다니는거다......(이것도 운이 좋으면!)





훤칠한 사람. 그런데 왠지 어딘가 불쌍해보이는 눈빛



중국 최대의 인터넷 검색포털 ‘바이두’(百度:www.baidu.com)가 미 뉴욕 나스닥시장 상장에 성공하면서 창업자인 리옌홍(李彦宏ㆍ36) 회장이 부호 반열에 올랐다고 중국 언론이 23일 보도했다.
리 회장은 이달초 나스닥에 상장한 공모주 가격이 첫날 122.54달러로 공모가(27 달러)의 3배 이상 오르면서 보유 주식의 가치가 9억여달러로 급등하면서 중국 10대 부호에 진입했다. 리 회장은 404만주의 기업공개(IPO) 공모주 매각 이후에도 22%의 지분을 보유했다. 우리사주를 주당 10달러에 1만주씩 받았던 직원 400여명도 돈방석에 앉게 됐다.
리 회장은 중국 베이징(北京)대에서 정보경영을 전공하고 미국 버팔로에 소재한 뉴욕주립대학에서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우존스와 검색엔진업체 인포시크에서 현장 지식을 쌓았다. 리옌홍은 실시간 정보시스템을 개발해 다우존스의 자매지인 월스트리트저널의 웹사이트를 비롯 월가 기업들의 웹사이트를 구축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난 1999년 말 중국으로 돌아온 리 회장은 `바이두`를 설립했다. 바이두는 중국 송나라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말로 `수백번, 수천번`이라는 뜻이다. 바이두의 나스닥 상장 성공은 지난해 중국 온라인 게임업체 성다(盛大)를 비롯 정보기술(IT)기업들의 나스닥 상장에 이은 ‘제2의 중국 닷컴 붐’으로 평가되고 있다. 바이두가 상장 첫날부터 대박을 터뜨린 것은 중국 인터넷시장이 가진 엄청난 잠재력 때문으로 보인다. 바이두는 인터넷 검색포털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모을 만한 여러 요소를 갖춘데다 중국 인터넷 이용자 수가 1억1000만명을 넘어한 상태에서 온라인 시장이 급속히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겹쳐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바이두는 중국 인터넷시장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구글(23%)과 야후(21%)를 제치고 37%의 이용률을 보여 바이두 주가상승이 1990년대 구글의 성장신화에 못지 않을 것으로 전망됐다.

허허...
자~알 생겼다!



장미란!
[세계와 세기를 놀라게 한 백남준의 일생] "예술은 원래 사기치는거야"


[조선일보 이규현 기자]

백남준은 시대를 50년쯤 앞서 살아간 위인(偉人)이다. 지금 현대미술에서 당연시하는 ‘과학과 미술의 만남’을 그는 반세기 전에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물건과 경험이 예술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새로운 장(場)을, 그때 열었다. 유럽인과 미국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작은 나라에서 온 작가였지만, 그가 전시를 할 때마다 세계 미술계는 술렁거렸다. 데뷰 때부터 현대 미술의 여러 흐름들을 이끈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미국 마이애미에서 29일 타계한 백남준은 국적을 초월한, 진정한 ‘월드 클래스 미술인’이었다. 텔레비전과 레이저·인공위성을 붓과 물감·팔레트로 삼고, 전세계를 아틀리에로 꾸몄다.

현재 ‘백남준 미술관’이 경기도 용인시에서 2007년 말까지 완공을 목표로 건립 중이다. 백남준의 매니저 역할을 해온 조카 켄 하쿠다 씨는 30일 본지와 전화에서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전화로 나에게 ‘한국의 미술관은 잘 되어가는가’ ‘꼭 한국에 가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한국에 가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존 핸하르트 수석큐레이터는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뒤 본지와 전화로 “백남준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조각, 설치, TV 프로젝트, 비디오 등 수많은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였다. 그의 창의력과 철학은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헌사를 전해왔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2000년 백남준의 회고전인 ‘백남준의 세계’전을 열었을 때 토마스 크렌스 관장도 “백남준은 지난 세기 미디어 예술에 심오하면서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 전시에서 백남준은 나선형으로 높게 솟은 내부 공간을 어둡게 한 뒤 레이저를 위아래로 쏘는 작품을 펼쳤다. 겹겹이 휘어지는 복도를 따라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그의 비디오 대표작들이 둥지 틀 듯 자리를 잡았다. 세계 화단은 “그의 작품들이 지난 세기에 이어 새 세기에도 세계 미술인들을 놀라게 했다”며 극찬했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 왼쪽 부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의 예술혼은 한번도 식을 줄을 몰랐다. 불과 15개월 전인 2004년 10월에도 그는 뉴욕 소호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피아노에 물감을 칠한 뒤 힘껏 밀어버리는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을 했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음악가였다. 백남준은 58년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할 때 그를 만났고, 60년대 초에는 전위 예술가인 요제프 보이스를 만나 그와 함께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했다.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건 탈(脫)장르 예술운동이었다. 백남준은 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이미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자리를 굳힌다.

그는 과학의 힘을 예찬한 예술가였다. 1984년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과학이 세상을 얼마나 밝고 아름답게 만들 것인지를 증언하고자 했다. 그 작품은 인공위성으로 서울-뉴욕-파리를 동시 연결하는 거대한 TV쇼였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에서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사회를 어둡게 그렸지만, 백남준은 이를 거부하며 “발달된 과학기술이 전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작품으로 웅변했다.



백남준에게는 삶 자체가 예술의 질료였다. 그는 모든 소재를 늘 참신한 예술의 형태로 만들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재활하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 ‘성적 치료(Sexual Healing)’를 2003년에 뉴욕 맨해튼에서 선보였을 때 그는 “인생 자체가 예술”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열여덟 살에 고국을 떠났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사용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고국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의 비디오 속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이미지에 김소월의 시구가 섞여 있고, 퀴리 부인정약용·허준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렇게 56년이 흘렀다. 30일 조카 하쿠다 씨는 “그의 유해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규현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kyu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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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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