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6>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③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26>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③

[프레시안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3. 근대적 인종주의의 본격적 발전

블루멘바흐의 퇴화이론


17, 18세기는 인종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점점 확고하게 된 때이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인간을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으로 나누었다. 그들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하나의 종일 수는 없으며 처음부터 다르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다인종설(多人種說)이며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믿었다.

이런 주장은 노예제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인종이 달라야 열등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17세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설명을 더 좋아했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자손이기는 하나 아프리카인이 흑인으로서의 열등함과 추함, 그에 따라 영원한 노예의 운명을 갖게 된 것은 햄의 아들에 내린 신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스웨덴 학자인 린네(C.Linnaeus)가 동식물을 종으로 나누는 새로운 분류법을 만들어냄으로써 다시 문제가 생겼다. 근대 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종을, 생식력 있는 후손을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인종 사이의 결합에서도 생식력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있으므로 모두 하나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근대 생물학의 아버지인 린네(C.Linnaeus, 1707~1778)

이것이 학자들을 고민스럽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퇴화이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그 곤란함을 피하려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18세기 후반의 독일인인 블루멘바흐 (J.F.Blumenbach)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대로 단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여러 인종들의 두개골이나 신체 각 부위의 모양이나, 자세들을 면밀히 비교 검토한 결과 인간은 하나의 종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 근대 인종주의를 학문적으로 확립한 블루멘바흐(J.F.Blumenbach, 1752~1840)

▲ 독일의 괴팅겐(Gettingen)시. 아름다운 대학도시인 게팅겐시는 19세기 초의 게팅겐 대학 7교수 사건 등 자유주의운동과 관련해서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편에서는 18세기 이후 유럽 인종주의 발전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한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의 종으로 시작했으나 사는 곳이 달라짐에 따라 기후나 생활양식 등 환경의 차이와 혼혈에 의해 다섯 개의 인종으로 나뉘었다고 생각했다. 코카서스 인종, 몽골 인종, 에티오피아 인종, 아메리카 인종, 말레이 인종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백인종인 코카서스 인종이야말로 최초로 생겨난 가장 아름답고 재능이 있는 인종으로 다른 인종들은 모두 이것이 퇴화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블루멘바흐의 이 퇴화 이론은 19세기 중반까지 인종주의적 생각의 중심 역할을 했다.
▲ 블루멘바흐가 분류한 다섯 개 인종의 두개골 모습.

인종주의의 학문적 확산

인종주의적 생각은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에게서도 거의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인간의 보편성을 믿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비유럽인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유럽인들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면 식민지배나 비유럽인의 노예화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럽인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로크나 디드로, 달랑베르, 흄, 칸트, 헤겔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이런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그렇다고 인종주의적 생각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성과 문명은 전적으로 백인, 서유럽인과 동의어였고 유럽 외부의 비백인들은 비이성, 야만성과 동일시되었다. 결국 이런 주장은 유럽인의 문화적, 인종적 우월성을 고무시킬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인종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해부학, 생리학,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집요하게 추구되었다. 녹스(R. Knox)는 1820년대에 영국 에딘버러 대학의 해부학자였다. 그는 많은 인간의 머리 골격이나 기타 몸체 구조의 분석을 통해 여러 인종은 분명히 해부학적인 차이를 보이며 그 외부적 특질은 지난 6천 년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종주의적 생각을 의학 분야에 광범하게 유포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언어학 분야에서 이런 일을 한 대표적인 사람은 고비노(J.-A. de Gobineau)이다. 그는 19세기 중반에 인간을 세 집단의 어족(語族)으로 구분했다. 햄어족, 셈어족, 인도-유럽어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북인도, 이란, 거의 전체의 유럽언어를 포함하는 인도-유럽 어족이다. 그는 인도-유럽어를 쓰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북유럽의 추운 지역에 사는 게르만족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혼혈을 통해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름다움, 신체적 힘, 지적인 능력에서 다른 인종이나 종족들을 훨씬 능가하는 코카서스 인종의 게르만족(아리아족)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비노의 주장은 19세기 유럽 인종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 1816~1882)

노예제와 19세기 미국의 인종주의 이론

19세기 인종주의 이론의 중요한 발전은 미국에서도 이루어졌다. 그것은 미국이야말로 노예제의 합리화가 중요한 과제인 나라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노예제는 미국민의 자유와 평등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열등한 다른 종이 있다면 이런 원리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쪽으로 논리가 발전하였다. 그런 생각은 헌법 기초자인 토마스 제퍼슨에게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노예제가 미국인들의 도덕적 성격에 암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의 폐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정신적,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의 흑인의 열등성을 지적하며 그들은 더위에 강하기 때문에 육체노동에 생물학적으로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뿐 아니라 미국 독립에 기여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노력은 1840년대 이후 특히 이집트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흑인의 문화적, 생물학적 열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모턴(S.G.Morton)이라는 해부학자는 두개골의 크기를 인간의 도덕적, 지적 능력과 결부시킨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인들의 두개골 연구를 통해 고대 이집트의 지배계급이 코카서스인이었다고 주장을 폈다.

'이집트에 니그로가 많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하인이나 노예였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고대 이집트를 흑인노예를 부리는 백인사회로 만들었다. 미국의 노예제 사회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서였다.

다윈의 진화론과 인종

찰스 다윈은 1859년에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주장함으로써 생물학의 혁명을 불러왔다. 그는 동물이나 식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과학적 증거를 수집했다. 특히 1835년에 그가 남미 에콰도르의 태평양상에 있는 갈라파고스 섬을 탐사하여 생물 진화의 흔적을 찾아낸 것은 유명하다.
▲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0) 진화론의 창시자.

그의 이론의 핵심은 종이 변화해 가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도태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생존투쟁에 이로운 특질들을 가진 개체들은 살아남아 후손을 재생산하는데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들은 경쟁에서 져서 그대로 사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도태를 통한 적자생존이 장기간 지속되면 이것이 유전형질을 변화시키고 이에 따라 종의 변이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바로 진화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윈은 이제 이렇게 만들어진 진화론을 가지고 인종 사이에 나타나는 여러 차이를 설명할 수 있었다. 모든 인류는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되었으나 진화에 의해 여러 인종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1850년대까지도 단일인종설(한 쌍으로 시작한 인류가 아마 환경에 의해 여러 인종으로 분화했다)과 다인종설(인종적 차이는 인류의 처음부터 존재했다)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다윈은 진화에 의한 변화를 가지고 단일인종설의 퇴화이론과 함께 다인종설의 불합리함을 함께 비판함으로써 두 이론의 다툼을 끝낼 수 있었다.
▲ 생물학의 보고인 갈라파고스섬(Galapagos Islands)의 이구아나.

스펜서와 사회적 다윈주의
▲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다윈주의를 인간사회에 똑 같이 적용한 이론이 사회적 다윈주의이다. 그 가장 유명한 주창자는 허버트 스펜서로 그는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생물학 원리를 받아 들여 그대로 사회에 적용했다.

동식물과 같이 개인이나 가족, 인종도 진화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으며 결국 사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생존투쟁, 계급적인 생존투쟁, 인종적, 문명적 수준에서의 생존투쟁도 모두 이 원리에 의해 합리화될 수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인종주의 이론의 기반으로 유럽에서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것이 자연과학의 껍질을 둘러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맹목적으로 존중되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분위기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유럽국가들의 제국주의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 이 시기는 유럽 국가들이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시기였으므로 사회적 다윈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하기에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다. 유전적으로 우월한 유럽인이 열등한 비유럽인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가 가장 크게 환영을 받은 곳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이다. 그 이론이 당시 거의 무제한한 자유를 누리며 급격하게 성장하던 미국 자본주의의 요구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inky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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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모태는 흑인이었다

 [오마이뉴스 정아은 기자] 오페라를 즐겨듣는 이라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베르디의 '아이다'를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으로 기억하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유럽문명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라고 일컬어지는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오페라 '마술피리'가 왜 이집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아이다' 와 비슷한 이미지로 남게 되는 것일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많은 신들의 이름이 로마와 이집트에서는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얼핏 역사 시간에 듣고 외웠던 적이 있다.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동일 신이라는 것. 이것도 그 당시에는 그냥 외우고 넘겼지만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왜 유럽문화의 모태라 일컬어지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그리스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 같은 이집트 신들과 동일인이라는 것일까?
<블랙 아테나>를 읽으면 석연찮게 남았던 이러한 장면들에 일제히 환한 등이 켜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나오는 자라스트로는 이집트의 지도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며, 그리스 신화속의 신들은 이집트의 신들이 건너와 변형된 것. 즉, 서양문명의 모태라 불리는 그리스 문명은 사실 이집트에서 유래한 한 분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문명의 우수성을 주장하기 위해 주류 사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우스갯소리로 비하되어 왔다. 그 후 우리의 역사시간은 '서양 문명의 출발은 그리스였다'라는 명제를 기본으로 하여 펼쳐진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확고한 고정관념. 서양 문명의 모태가 그리스 문화였다는 개념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불과 2세기 전인 19세기, 그것도 일부 사학자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서양에서 19세기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이 활발하던 때였고, 그런 제국주의 침입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인종주의가 팽배하던 때였다. 그리고 서양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게 되는데, 독일과 영국의 지배 계층은 중도적인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대안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다고 버낼은 보고 있다. 이제 고대 그리스 문명 또는 헬레니즘은 서양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데 그 그리스 문명이 인종적으로 열등한 이집트인과 셈족에 속하는 페니키아인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서양학자들은 용이할 수 없었고,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인의 기록을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옮긴이 해설: '블랙 아테나'라는 책>
이렇게 잉태된 '그리스 문화 날조'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그때마다 특정 정치세력의 필요에 의해 더욱 그 형상을 공고히 해갔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고대사의 뿌리인 고전학은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보수 체제가 부활한 1815년과 1830년 사이의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학문적으로 유럽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띤 고전학은 이렇게 유럽 사회에 정치 사회적으로도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절대화, 신격화. 그 시작은 식민지에 대한 폄하를 목적으로 한 독일인들에 의해, 발전과 집대성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진보의 기운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던 보수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날조된 그리스 문명'은 역사학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기본 전제가 되어 세계 방방곡곡의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강자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라는 진리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예시가 아닌가.
이 책은 그리스 문화가 후세에 의해 어떻게 쓰이는지, 그 변천과정을 시대별로 나누어 조목조목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이집트가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문명을 이룩했던 시절 그리스와 맺었던 관계, 이후 이집트 문명이 그리스·로마 문화라는 지류를 낳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러한 역사가 후세인들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왜곡되는 과정을 방대한 자료와 학술적 근거를 인용하며 낱낱이 밝히고 있다.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나왔다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의 지리적, 언어적, 역사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집트인은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자신들이 노예로 부리는 식민지인들이 자신들이 자랑하는 찬란한 문명의 본체였다는 사실은 상상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유럽의 제국주의자, 그리고 그들에 동조하는 일단의 사학자들은 거의 운명적으로 그리스 문화의 날조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각종 사료에 남아 있는 뚜렷한 증거들은 두고두고 '우스갯소리'로 비하되었다.
영국 런던 출신의 마틴 버낼은 이러한 유럽인들의 문화적 오만을 좌시할 수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집트인이 흑인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발견한 이 열렬한 사학자는 자신의 본래 전공이었던 중국학에서 100% 방향전환을 하여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의 커다란 비밀을 파헤치는 작업에 뛰어들게 된다.
...이집트에 생각이 미친 후에는 "왜 전에는 이집트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문제에 더욱 심각하게 빠져들었다. 너무나 명백했다! 그리스가 생기던 수천 년 동안 이집트는 동부 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작가들은 자신이 이집트의 종교 및 여타 문화에 빚졌음을 길게 기록했다. 이집트학 학자이신 외할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고대 이집트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음에도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리스와 이집트를 연계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매우 뿌리 깊은 문화적 억압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히브리어, 셈어 등 수많은 언어를 공부했고 그리스와 이집트에 관련된 수많은 학술서를 공부했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토론을 주고받았다. 그가 펼쳐가는 이 방대한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리스 문명과 이집트 문명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소수민족들이 그리스 문화의 신격화와 더불어 어떻게 폄하되고 박해받았는지도 적나라하게 지켜보게 된다. 그리스 문명 날조 작업이 반유대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놀랍고도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슬픈 일이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억압의 변천사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독자가 재밌게 목격하게 되는 것은 시대별 그리스 문화 날조사만이 아니다. 이 방대한 저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적 위인들, 흔히 서양의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유명인물들이 '인종주의'라는 프리즘을 들이대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지켜보는 재미도 일품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집필했던 1850년대에도 마르크스는 고대 모델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가 그리스의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이집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그의 도식을 망쳐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가 이집트와 범주적으로 구분되며 이집트보다 우월하다고 누구나 뼛속 깊이 느끼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 모델의 파괴는 이 문제에 관해 헤겔이 누릴 수 없던 자유를 마르크스 세대에 부여했다. 마르크스는 그리스에 끼친 이집트의 영향을 철저히 부정할 수 있었다...
전세계 노동자들의 궐기를 부르짖었던 칼 마르크스. 가난한 노동자의 애환을 통찰할 수 있었던 그였지만 그 안에 자리해있던 자신의 인종주의는 들여다볼 수 없었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 중 일부만이 내 자아의 조명을 받는 것. 그렇게 수많은 위대한 자아들이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끝까지 눈을 감았고, 그것이 오늘날 서양문명의 우월함을 공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내 안에서 영원히 잠잘 뻔했던 의식 하나가 눈을 번쩍 떴다. 이후 이 눈은 다시는 감기지 않고 내 안에서 영원히 반짝이게 되리라. 고정관념을 깨는 책은 언제나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 요동치며 꿈틀거리게 한다. 이 내용을 모두 신뢰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뚫고 들어가려 했던 그 간극을 주시하게 된 것, 그 간극 너머에 넘실거릴 수많은 진실들을 상상해 보았던 것은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발칙한 책'을 읽음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너무 어렵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쓴 책이라고 보기엔 내용이 너무 난해하고 사학자나 언어학자를 독자로 가정하고 씌어졌을 것 같다. 그리스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 관해 이미 많은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전제로 쓰였기 때문에 내용이 웬만해서는 잘 잡히지 않는다. 셈어니 히브리어니 하는 전문적인 지식들로 출발하는 이 난해한 책을 읽다 보면 포기할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책의 반정도 분량을 차지하는 기나긴 주석들과 역자의 해설을 들척이면서 끈기를 가지고 읽어나가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하다. 돌파과정이 어렵기는 해도, 읽고 나면 전문 사학자가 갖는 지식을 가지게 된 것 같은 지적 우월감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웬만한 역사서 10권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주는 이 방대한 책은 읽는 이의 가슴에 수많은 의문들을 두고두고 메아리치게 할 것이다./정아은 기자- ⓒ 2006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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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테나 1(날조된 고대 그리스,1785~1985)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마틴 버낼 (소나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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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친구중에 꽁이라는 귀여운 애가 있는데
그아이가 언제 한번 천진에 갔다가 이상형을 만났다고 했다.
그래서 다들 춤추는데 혼자 그냥 멀뚱-히 쳐다보고 서있기만 하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려고 가려는
그 사람의 가방을 잡아당겼다가 그사람이 뒤돌아 봤는데 그의 화사한 미소에 한번더 멀뚱히~가 되었다고 한다.
태어나서 별로 볼 기회가 없는 그런 첫눈에 반하는 사람.
시험이 끝나고 다시 천진에 간다고 해서 걱정이 되서 같이 가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가는길에 옆에 앉은 믈라와 미친 놀이를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 얼굴에 그리기~ 그리고 사람들이 다 자고 있었지만 앞에 나와 춤추기. 마침 우리나라 드라마인 풀하우스를 봤는지 곰 세마리 노래를 불러서 웃겨서 죽는줄 알았다.ㅋㅋ
물론 내 얼굴도 얌전하진 않았겠지만..

도착해서 다른 태국인들을 만났는데,
이럴수가! 한명이 나 옛날 고등학교에서 영어 같이 듣던 애랑 너무 닮았다.
참 신기하네.ㅋㅋㅋㅋ

저녁은 한국 음식점에서 먹고
집으로 돌아와 각자 화장을 하는데
아니, 주인공 꽁 여사께선 그냥 청치마에 파란 티 이게 끝이 란다!
그래서 급하게 급하게 내 옷이랑 바꿔 입히고 화장도 해줬다.
원판이 예뻐서 그런지 참 예뻤다~

그리고 도착한 클럽.
꽁의 그 분은 기타리스트. 선한 인상의 남자.무대에서 내려왔을때를 노려서 가서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결혼하셨단다. 반지를 보여주면서 정말 미안하단 표정의 그에게 이미 술 많이 들어간 그녀는 '나 너 좋아해~'이렇게 당당하게 수차레 고백하고 나서야 홀가분하게 뒤돌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밴드의 드러머가 관심이 있었던지 적극적으로 전화번호까지 물어봤다.그러자 그녀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보였고(역시 여자는 자기에게 관심 가져주는 남자가 최고다!) 우린 토하는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말정말 안타깝게도 이날 갔다와서 꽁의 어머니께서 갑자기 사고가 나셔서 급하게 분위기가 안 좋아졌었지만
그 부분만 빼면 나름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참, 남쪽 아이들은 재밌게 잘 노는것 같다.

                      아~ 나도 얼굴 작아지고 눈 커지고 싶어라~



                     

예쁜 꽁~


                       오른쪽, 진짜 옛날 썸머 영어 같이 듣덛 페이자 닮았다. 도플갱어!





http://www.lifesci.net/way/khap/

이론

http://blog.daum.net/moonchung/




티벳, 내가 많이 사랑하는 나라.












고모의 관상어 ㅋㅋ

사진출처:http://flowerhorns.co.kr/
since I had it with my fingerS, I can't even have a TY shaped hole in unive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