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마피아의 대부로 활약해온 살바토레 로 피콜로가 드디어 경찰에 잡혔다.
최근에 시실리섬 팔레르모의 외곽 지역에 있었던 마피아 수뇌부 모임 현장을 급습해서 잡았다고..
이들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현재 마피아 계보에 관한 중요한 서류들도 발견했다고 한다.
지난 24년동안 수배되어온 피콜로가 드디어 잡힘으로서 이탈리아 범죄 조직이 상당한 타격을 받겠지만
오히려 젊은 보스의 시대를 열어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한다.
한편 이들 마피아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내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마피아 조직의 한 해 매출액이 약 900억 유로로 이탈리아 국내 총생산의 7%에 이른다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업가들이 마피아에 정기적으로 바치는 돈이 매년 300억 유로라고..
우리 나라의 조폭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돼~ㅎㅎ
왜 도데체 불쌍하고 착해보이는거지? 보통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상..
그런 힘으로 보스가 된건가?

“나한테 에이즈 옮은 새 남편 끝까지 나를 탓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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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7월4일은 르완다의 인종청소 종식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날 피해자인 데보라(50·왼쪽 사진)와 가산자이레(40·오른쪽)를 만났다. 이들은 르완다 수도 키갈리 외곽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판자촌에 산다. 아이들은 쓰레기가 뒹구는 미로 같은 골목에서 뛰어놀고, 화장실이 변변치 않아 악취는 진동했다. 이곳의 가구당 한달 평균 수입은 5만원도 안 된다. 학살의 잔영이 여전히 드리웠지만, 정은 넘쳤다. 인종청소에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서로에게 의지해가며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 여섯도 죽임당해 총구 사라진 것 자체가 행복”
■ 이젠 슬프지 않아=데보라는 남서부 기콩고로 출신이며, 투치족 농부 가족의 7남매 가운데 셋째다. 그는 7살이던 1963년 성탄절 전날, 후투족 여러명이 집으로 몰려와 아버지를 데리고 간 뒤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인종청소가 갓 시작된 94년 4월11일 그의 남편은 바나나 농장에 숨어 있다가 살해당했다. 가차차 법정에서 후투족들이 칼로 남편의 머리를 두동강냈다고 한다. 후투족들은 13일 뒤 투치족들이 모여 있는 교회당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아이 4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데보라는 “죽어 가던 넷째가 ‘엄마 그들이 나의 머리를 쐈어요. 내가 죽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며 흐느꼈다. 나머지 아이 둘은 그 다음날 난자당해 죽었다. 당시 맏이는 13살, 막내는 생후 26개월이었다.
온몸이 찔려 강에 버려진 데보라는 혼자 사는 후투족 노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 노인은 머리에 구더기가 끓던 데보라를 정성껏 치료하고 석달 동안 숨겨줬다. 유일하게 생존한 조카를 자신의 아들처럼 보살피는 데보라는 슬픈 옛일이 생각나지 않느냐는 물음에 “전혀 아니다. 내게 겨눈 총구가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날마다 행복”이라고 대답했다.
■ 시한부 인생=남부 니얀자에서 태어난 가산자이레는 94년 폭도로 돌변한 이웃 사람들에 의해 결혼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명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만신창이가 돼 삶을 포기하려던 그를 구해준 사람이 두번째 남편이다.
두번째 남편은 자신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겨줬다고 한다. 인종청소 당시 잉태된 아이가 가산자이레의 맏딸이다. 그는 남편과 아이 둘을 더 낳으며 다시 희망을 얻었다.
2000년 봄, 갑자기 몸이 약해진 그는 병원에 가서야 인종청소 당시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도 2년 전 에이즈로 죽었다. 그한테서 감염된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은 끝까지 그를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에이즈에 감염된 게 알려지면 이 동네에서도 따돌림당하게 된다. 큰딸 레티샤는 이미 에이즈에 걸린 것 같다.
돈 벌 길이 없는 그에게 이웃들이 음식을 나눠주며 도와준다. 인종청소 때 친척이 다 죽었으니 자신이 죽고 나면 아이들은 누가 돌볼지, 아이들마저 모두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될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데보라는 가산자이레가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게 됐다. 인터뷰 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들은 떠나기 전 기자에게 “인종청소 당시 우리를 도와준 후투족도 많고, 그러다 동족의 손에 죽은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키갈리/서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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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안효은 기자] 5일 팬들의 곁을 떠난 파바로티는 어릴적 음악보다는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1935년 10월 13일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아마추어 가수이자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난 파바로티는 생전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항상 행복했다. 우리 가족은 형편이 어려웠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해내리라고 믿었다"고 말해왔다.

어린 시절 파바로티는 공부보다는 축구에 더 재능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수인 아버지가 소장한 베냐미노 질리, 티토 스키파, 유시 비욜링, 주세페 디 스테파노 같은 유명 테너들의 음반도 항상 즐겨 들으며 음악에 대한 열정도 이어갔다.

파바로티가 어릴적 함께 노래를 공부한 친구이자 현재 유명 소프라노가 된 마렐라 프레니와 함께 음반을 내고 콘서트 무대에 선 일은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십대에 접어들어 파바로티는 아버지와 함께 교회 성가대와 지역 오페라 코러스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영화에서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가수 마리오 란차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십대 시절 마리오 란차의 영화를 즐겨 봤다. 그의 영화를 본 날이면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란차를 흉내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노래는 그에게 취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20살이 되던 해, 코러스와 함께 팀을 결성해 월레스에서 열린 국제 음악 대회에 나간 파바로티는 일등을 거머쥐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발을 들여놨다. 그의 약혼자였던 아두아 베로니의 격려로 정식 교습을 받기 시작했으며 교습비를 돈으로 지불하기에 형편이 어려워 보험으로 교습비를 대신하기도 했다.

1961년, 파바로티는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고난 뒤 오페라 '라보엠'에 출연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후 연이은 오페라의 성공으로 전세계인에게 이름을 알리며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났다.

그만의 환한 미소와 육중하게 움직이는 모습, 아리아, 손수건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취향 등은 '파바로티스러움'으로 각인됐으며 그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페라로 명성을 얻은 후 파바로티는 1982년 제작된 영화 '죠르지오의 사랑', '리골레토'의 영화 버전에도 출연했으며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는 자서전 '나,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저술했으며 텔레비전 광고에도 등장했다.

이외에도 1992년부터 95년까지 보스니아전이 계속되자 U2의 리드 싱어인 보노와 함께 의료원조를 실시했으며 전쟁이 끝난후에는 모금을 통해 보스니아계 예술인들을 위한 파바로티 음악 센터를 설립해 음악적 후원에도 앞장섰다. 또한 1988년 미국에서 있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며 자선사업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삶만큼이나 구설수도 항상 끊이지 않았다.

모데나에서의 콘서트에서 립싱크를 한 것이 드러나 비난을 받았고, 한 여류 예술가에게서는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탈세 혐의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바로티는 항상 자신의 죄를 부정했고 "나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괴로운 심정을 밝혔다.

말년인 2006년 7월 파바로티는 뉴욕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송별 공연을 준비하던 중 췌장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결국 콘서트를 취소한 채 뉴욕에서 수술을 받았다.

중병을 앓고 있음을 안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행운을 타고난 행복한 사람이다. 이제 그 행운과 행복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병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파바로티는 소수의 학생들을 교습하면서 종교 음악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2008년 발매될 예정이었다.

수술 후 그는 페자로 아드리아해에 인접한 고향 모데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요양했고 전세계 팬들은 그의 쾌유를 빌었다.

이에 최근 그의 두번째 아내 만토바니는 이탈리아 신문 스탐파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사자와 같이 싸우고 있다. 그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바 있으나 파바로티는 결국 6일 타계했다.

그가 타계하는 자리에는 아내 만토바니와 여동생 가브리엘라를 비롯해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세 명의 딸 로렌자, 크리스티나, 기우리아나,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앨리스, 그의 사촌들과 가까운 친지들, 친구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5일 타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 사진=루치아노 파바로티의 'Ti Adro'앨범]

안효은 기자 pandol@mydaily.co.kr



10년전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된 법정 서류 수만장과 사진들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다이애나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교통사고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내달 2일부터 열리는 조사 준비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했습니다.

프랑스 사진가 파브리스 샤세리의 변호인 자격으로 조사에 참여한 장-루이 펠르티에는 '법정에 사건파일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으나 서류가 사라지고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샤세리는 사고 당시 다이애나와 도디 파예드가 탄 차량을 추격하던 파파라치 9명 중 하나였으며 펠르티에는 샤세리가 사고 차량에 갇힌 다이애나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료를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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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옥 기자
c:http://news.media.daum.net/foreign/others/200709/06/YTN/v18046243.html?_right_TOPIC=R4
i: http://blog.naver.com/NBlogMain.nhn?blogId=dudrn654
국내에서 압생트라는 술은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대중적으로 널리 마시는 술도 아니다. 그런데도 압생트라는 술은 우리에게 꽤 익숙하다. 왜일까? 아마 예술, 특히 회화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압생트에 대해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럼, 이번 기회에 압생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위 : 현재 시판되고 있는 압생트 중 하나)

1. 압생트란?

압생트는 본래 알콜 함유량 70~80퍼센트의 독한 술로 당분이 함유되지 않아 맛이 쓰며, 아니스, 히솝, 향쑥 등의 향초(香草)를 원료로 이들을 증류하여 만들어낸 에메랄드 그린 빛깔의 술이다. 185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뒤이어 유럽 전역과 남미에서 군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술로 특히 프랑스에서는 식전주(食前酒)로 애용되었다.

재료로 사용되는 모든 향초가 특별히 돌보지 않아도 어디서나 잘 자랐기 때문에 그 원료를 구하기가 매우 쉬웠고, 제조 방법도 어렵지 않았으며 와인처럼 제작자의 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값이 무척 싸서 서민들의 싸구려 술의 대표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술이 프랑스에 나온 초기에 신문과 벽보에서 “압생트는 몸에 좋습니다”, “의사가 추천하는 몸에 좋은 술 - 압생트”, “압생트가 당신의 건강을 지킵니다” 등의 광고가 물결처럼 밀려들어 ‘독한 술’, ‘값싼 술’, ‘몸에 좋은 술’이란 이미지가 겹쳐서 금세 프랑스의 국민주가 되었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에서는 식사 전에 압생트를 마시는 탓에, 식사 시간을 ‘녹색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유난히 캬바레나 술집이 많은 몽마르트르 언덕 대로변에선 압생트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특히 1890년에는 파리에서만 압생트의 연 소모량이 10만 5천여 헥토리터(1헥토리터 = 100리터)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위 : 영화 물랑루즈에 등장한 '녹색 요정' 압생트의 라벨)

유행처럼 번져나간 압생트는 ‘녹색 요정’, ’녹색의 마주‘, ’미치광이 술‘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예술인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다. 왜냐하면 압생트에는 마시면 환각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었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 술을 마시고 영감을 얻어 시나 그림을 그렸기 떄문이다.
이렇게 프랑스의 국민주이자 예술가들의 국민주가 된 압생트였지만, 곧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사회적으로 압생트에 취해 생긴 수많은 범죄 때문에 사회 질서가 무너졌고 건강을 해친 사람이 속속 들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원산지인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1915년을 전후로 압생트의 제조 판매를 금지했고 이어 대부분의 국가에서 압생트의 생산을 중단했다.

하지만 최근 스위스에서 ‘압생트가 다른 술에 비해 끼치는 위험성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스위스에서 법령을 통과, 알콜 농도를 40% 정도로 낮추고 향쑥을 사용하지 않아 환각 작용이 없는 압생트가 소량 생산되어 판매되고 있다.
2. 무엇이 문제인가? - 압생트의 부작용

그럼 무엇이 그렇게 문제 길래 압생트는 금주가 된 것일까

압생트 중독은 알콜 중독의 특이한 형태 중 하나로 ‘알테미시아 압신툼’이라는 알콜 성분을 남용함으로서 생기는 병적 증상이다. 압생트에는 트존(Thujone)이라는 유해 성분이 있어서 중독을 일으키는데 아놀드(W. N. Arnold) 교수가 발표한 <빈센트 반 고흐와 트존 관계>라는 논문에서 압생트의 유해성에 대해 자세히 나와있다.
이 논문에서 아놀드 교수는 토끼에게 압생트 성분인 압산 유(油)를 정맥에 주사하면, 토끼는 자율 신경계에 심한 흥분을 느껴 의식 장애와 간질양 경련을 일으키고, 순수한 트존을 주입 시에는 강직 간대성 경련을 일으키며 트존에 반복적으로 장기간 노출 될 경우 중추신경계에 영구적인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위 :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 등장하는 압생트 제조 장면. 일반적으로 압생트는 물과 1:1 비율로 묽게 해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압생트를 많이 마실 경우, 압생트 중독 상태에 빠지는데 이 중독 상태에서는 간간이 발작이 일어나게 된다. 압생트 발작의 특징은 ‘무경련성 착란(錯亂)’ 상태로, 경련이나 거품을 무는 등의 일은 없지만 내면적인 혼란이 오게 된다. 즉 내면적 지표를 잃고 괴상한 행동이나 조리에 닿지 않는 말을 하며 멍한 상태로 있게 되며 심한 환각이나 환청, 착시 현상에 빠진다. 또 발작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멍하고 흐릿하며 실제 모습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이런 환각은 신경계에서 연유되지만 그 내용은 당사자의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르며, 제정신을 회복한 후에는 발작 시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압생트 중독자는 성격에 혼란이 오는데, 극도의 흥분 상태나 권위적 태도, 갑작스런 분노나 성에 대한 갈구 등이 대표적인 증상이다.
일단 발작이 일어나면 대상자는 강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거칠고 격한 공격 충동이나 피학 충동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압생트를 마시고 일어난 살인 사건이 상당히 많았으며,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것도 이런 압생트의 영향이라는 설이 많다.
압생트 중독자로 유명한 반 고흐에게는 압생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 고흐가 아를 시립 병원에 입원 중일때 그의 담당 의사인 레이가 반 고흐의 과도한 음주를 나무라자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올 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선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반 고흐의 그림의 특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상할 정도로 불타는 듯 한 노란색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과 전등빛이나 태양이나 별에 사용하는 운륜인데, 즉 반 고흐는 그 노란색들을 얻기 위해 압생트를 마셨다는 것이다. 이 변명은 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약쑥을 증류해 만든 압생트에는 시신경을 손상시키는 테레벤(Tereben) 유도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술을 많이 마셔 중독되면 시각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테레벤 유도체를 통한 대표적인 시각 장애가 바로 색맹으로, 그 중 색채 이상이 대부분인데 반 고흐가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시증(黃視症)도 그 부작용 중 하나다.
이런 수많은 부작용은 현재의 압생트에서는 볼 수 없다. 현대에 와서는 향쑥 등의 유해 물질을 제외하고 압생트를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더 이상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압생트의 환각을 볼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워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리라고 믿는다.

3. 예술가의 술 - 압생트의 영향

앞서 계속 말했다시피 압생트는 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면 파리 문인 클럽의 모파상이나 랭보도 이 술을 즐겨 마셨으며 랭보는 압생트가 주는 환각적인 취기를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이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파블로 피카소 역시 압생트의 포로 중 한명으로 유명하다.











위는 에드가 드가의 <압생트 마시는 사람들>로, 여자 앞에 놓인 술잔에 담긴 술이 압생트다. 당시에 압생트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즐겨 마시는 술로 어느 카페에서나 팔고 있었으며 랭보가 살다시피 한 술집의 이름은 아예 <압생트 아카데미>였다고 한다.

위는 고갱의 <아를의 밤의 카페>. 고갱은 반 고흐와 동거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위의 모델은 두 사람을 가장 이해한 사람 중 한명으로 전해지는 지누 부인이다. 지누 부인 앞에 놓인 것이 압생트 잔과 싸구려 압생트 술병으로, 고갱은 고흐에 대한 반감으로 이 그림에서 지누 부인을 창녀들의 뚜쟁이처럼 표현했다. 이 그림 때문에 고흐와 고갱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

위는 마네의 <압생트 마시는 남자>. 마네가 최초로 살롱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마네의 이 그림은 당시 전통예술의 우아함과 품위를 중시하던 살롱에 내민 도전장이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살롱 심사위원들의 반대표를 얻어 낙선했다.



위는 파블로 피카소의 <압생트 마시는 사람>. 피카소의 독특한 화풍이 나타나기 전의 작품들 중 하나이다. 피카소의 친구들도 대부분 압생트를 즐겨 마셨으며, 특히 피카소의 압생트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고 한다.

위는 물랑루즈의 난쟁이 화가 로드레크의 <라미에서>. 탁자에 놓인 술이 압생트다. 로드레크는 주위에서도 유명한 애주가로, 압생트에 코냑을 섞어 ‘지진’이라 이름 붙여 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반 고흐에게 압생트를 가르친 것도 로드레크였다.



위는 빈센트 반 고흐의 <압생트가 있는 정물>. 아마도 가장 유명한 압생트 그림이 아닐까 싶다. 반 고흐의 압생트, 라고 불릴 정도로 반 고흐는 압생트를 즐겼다. 가장 유명한 귀 자르기 사건도 압생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추정되며, 그가 말년에 겪은 수차례의 발작은 압생트 중독에 의한 간질발작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로드레크나 알프레드 미쉐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이 외에도 압생트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그 소재로 사용했다. 와일드는 압생트를 마시고 바닥에서 화려한 튤립이 피어나는 모습을 봤다고 적었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압생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현대 음악의 2대 아버지 중 한명으로 불리는 음악계의 천재, 에리크 사티나 모리스 위트릴로, 르느와르도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고 전해진다. ‘무기여 잘 있거라’로 유명한 어니스트 허밍웨이나 ‘검은 고양이’의 애드거 앨런 포도 압생트 애호가로 유명하다.

4. 최근의 압생트

본래 압생트는 1908년 압생트로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에 스위스에서 판매, 제조 금지령을 내리고, 뒤이어 1915년 3월 16일 프랑스에서도 금지령을 내린 뒤 체코나 스페인, 유럽 전역에서 잇따라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1981년 유럽공동체(EC)에서 압생트 합법화 결정을 내린 뒤, 체코와 스페인에서 생산이 재개되었고 스위스에서도 최근 100년 만에 판매금지를 해제하고 재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스위스에선 이 술의 위험도가 다른 술보다 그리 높지 않으며, 현대의 기술력으론 유해물질의 농도는 어렵지 않게 조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주류업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금지 후에도 스위스에서만 연간 1만 5천여리터가 암암리에 제조되고 있었지만, 합법화로 인해 최근 들어선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름을 타고 활발한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환각 증세나 수많은 부작용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은 단지 독하고 쓴 술로서 과거 예술가들이 마셨던 술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가끔 찾아 사가는 술이 되었다. 현재 생산되는 압생트는 도수 또한 40도 정도로 낮다.

(위 : 압생트에 얽힌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 빈센트 반 고흐의 얼굴을 달고 나오는 시판 중인 압생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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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202.204.40.105/jiaowu 중의대교학처
[현장] 송기호 변호사, 법정에서 '한미FTA 문제점' 증언

[프레시안 대전=김하영/기자]

"저는 보통의 통상법이나 세이프가드, 반도체, 덤핑 사건 등 돈 되는 일을 하는 변호사였습니다. 그런데 2005년 WTO 쌀협상이 타결된 당시 한 농민이 여의도에서 합법적 집회를 하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죽었습니다. 왜 죽어야 합니까. 아직도 (경찰이) 죽음의 원인에 대한 조사결과나 재발방지책을 내놓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29일 오후 6시 대전법원청사 316호 법정의 증언대에 선 송기호 변호사는 이와 같이 말했다. 송 변호사는 대전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김상준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한미FTA 반대 시위 피고인들의 재판에 '피고인들이 한미FTA 반대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증언하기 위한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피고인들은 지난해 11월 대전시 중구 충남도청 앞에서 열린 한미FTA저지 총궐기대회에서 불법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됐고, 일부 피고인은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송 변호사는 "전용철 농민이 집회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통상법 연구가에 지나지 않았다"며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는 농민이 경찰 진압에 의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왜 이런 비극적 결과가 발생하는지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이어 "그 이후부터 통상협상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 자영업자 등 이해당사자들이 통상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통상정책을 만들기 위한 국민주권의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이날 '한미FTA 전문가'로 법정에 나섰다. 일종의 감정 증인으로 이 경우 전문가의 견해는 의견서 등의 형식으로 제출되나 최근 구술 중심의 공판중심주의 추세에 따라 직접 법정에서 증언을 했다. 송 변호사는 노트북 컴퓨터와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법정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며 1시간 동안 한미FTA의 문제점에 대해 역설했다.

재판부는 송 변호사의 설명을 주의깊게 들으며 의문점이 있으면 바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방식으로 증언을 청취했고, 100여 명의 방청객들도 숨죽여 송 변호사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등 서류 위주의 재판에서는 볼 수 없는 진지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정부는 통상정책 수립 과정에 이해당사자 참여 기회 주지 않았다"

송 변호사가 보기에 외국과의 통상협정, 특히 한미FTA 체결은 경제체제와 공공질서는 물론 국내법 체계까지도 바뀌게 되는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한미FTA에 의해 직접적 피해를 받는 이해당사자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는 형편이다.

송 변호사는 "한미FTA에 대한 공청회가 무산됐음에도 정부는 바로 협상개시를 선언했고, 이른바 '한미FTA 자문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한미FTA 찬성론자나 한미FTA 체결로 인해 이익을 보는 인사들뿐이었으며, 농민 등 이해당사자들이 협상과정에서 정부에 한미FTA 협상 내용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해도 전부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며 "정부는 한미FTA로 피해를 입게 되는 이해당사자들과 협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송기호 변호사. ⓒ프레시안

송 변호사는 또 "특히 정부는 85억 원 이상을 들여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각종 홍보와 광고를 하면서도, 한미FTA 반대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 제작한 TV광고는 방송금지 처분을 내렸다"며 "방송금지 처분의 부당성을 최근 행정법원에서 인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회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했다. 송 변호사는 "사실상 국회는 협상과정에서 보고를 받기는 하지만 정부가 주도해 마련한 협상 비준안에 대한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역할밖에 못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이해당사자인 국민들이 국회를 통해 한미FTA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송 변호사는 "이렇게 의견 전달에 법률적 제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이해당사자들은 집회 등의 방법으로 직접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물론 직접행동도 법률적 한도 범위 내에서 해야 하지만, 그 집회마저도 경찰이 원천봉쇄를 하는 등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반면 "미국의 국회의원들은 자기 지지기반의 이해관계에 따라 많은 압력을 행사하고 있고, 이해당사자들은 시위를 하는 대신 무역대표부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해서 직접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서 사법부를 대상으로 증언을 하는 만큼, 한미FTA로 인해 우리나라 사법체계에 어떤 충격이 오는지에 대해 강조했다. 재판부도 송 변호사의 지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송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헌법 제119조에 국가가 공익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재산권을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경제 민주화의 규정을 두고 있다"며 "한미FTA와 우리 헌법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헌법 제119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한미FTA, 헌법 경제민주화 조항 공격할 수도"

송 변호사는 특히 "한미FTA가 발효되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데, 국내 사법질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 변호사는 "예를 들어 지역의 중소 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헌법정신에 근거해 국내법상 대형할인마트의 진입을 규제할 수 있으나 한미FTA가 발효되면 미국 투자자가 대형할인마트를 열려 할 때 이를 규제하는 한국 정부가 국제중재소에 제소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또 "미국인 투자자가 국내법에 따라 국내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받고 국내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도 사법 절차에서의 부당성을 제기하며 대법원 판결도 국제중재소에 제소할 수 있게 된다"며 "한미FTA는 경제개방 문제 뿐 아니라, 사회 유지의 근간인 사법질서마저도 흔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재판부도 송 변호사의 지적에 관심을 기울였다. 김상준 부장판사는 국재중재기관 제소시 중재기관의 판결이 국내에서 어떤 강제력을 지니게 될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하는가 하면 "우리 법(대륙법)은 큰 줄기를 정하고 시행령에서 상세한 내용을 다루는 것과 달리 영미(英美)법은 법률에 구체적 내용까지 상세히 다루고 있어 격이 안 맞는 불만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송 변호사는 이에 우리나라는 "외국과의 통상협정을 국내법과 동일한 지위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례에 의해 한미FTA도 국내법과 동일한 법률로 인정되는 데 반해, 미국은 한미FTA 협정 조항을 FTA이행법의 하위조항으로 하기 때문에 미국 국내법과 동일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 "합당한 절차 마련해 조화 이루는 방법 필요하다"

송 변호사는 마지막으로 "전용철 농민의 죽음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이해당사자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참여할 수 있는 통상절차법 등의 법적 틀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며 증언을 마쳤다.

재판부는 "장시간 증언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한미FTA를 보는 시각은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에 이익이 되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절차이며 합당한 절차를 만들어 조화를 이뤄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며 재판을 마쳤다.

한편 이날 재판의 6명의 피고인 중 김모 피고인은 송 변호사의 증언을 청취한 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증인으로 신청하고 싶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김 씨는 "김 본부장을 위증을 하면 처벌 받는 재판정에 불러 그동안 한 거짓말을 다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김 본부장은 이번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어 재판부가 김 본부장을 증인으로 채택할지는 미지수다.

대전=김하영/기자 (richkh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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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공격적 선교행태 반성

기독교계 성찰론 봇물
타종교·타문화 무시행태
국민들 우려 귀 기울여야

한국 교회는 아프간 피랍 사건을 계기로 뼈아픈 자기성찰을 요구받게 됐다.

사건 이후 개신교회는 성난 누리꾼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성토를 당했다. 타 종교와 타 문화를 무시한, 무분별한 선교 행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까지 이를 “신도들로부터 헌금을 기대하고 사진 찍기에 불과한 활동을 하는 ‘캠코더 선교’”라고 비꼬았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듯, 인질 석방 발표 다음날인 29일 교계에서는 일방적 선교를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봇물을 이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성명을 내어 “선교의 전면 중지 합의를 한국 교회가 존중함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보수적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성명을 발표해 “분쟁지역 선교에 신중을 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인 김명혁 목사(강변교회)도 최근 “이번 사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라며 한국 교회의 각성을 촉구한 바 있다.

국외선교 방식을 재검토하자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기총, 세계선교협의회 대표들은 30일 오전 7시 한기총 사무실에서 만나 ‘아프간 사태 이후-한국 교회의 역할’을 모색할 대책회의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교회 연합기구들의 노력이 실제 한국 교회의 국외선교 패턴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피살된 이후 무분별한 국외선교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지만, 선교의 행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세계선교협의회는 현재 1만6천여명으로 세계 2위인 해외선교사 수를 2030년까지 10만명으로 늘리자는 비전을 아직도 홈페이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사랑의 봉사단’ 대표인 황성주 박사가 제시한 ‘선교사 100만명 파견’과 순복음교회의 10만 선교사 파송, 명성교회와 온누리교회의 1만명씩 선교사 파견 비전 등이 담겼다. 중앙 연합기구의 ‘말’과 달리, 개별 단체, 교회 차원에선 기존의 공격적인 선교 행태가 쉽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와중에 기존 선교 행태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확인된 점도 주목된다.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가 최근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85.3%가 국외 봉사 선교활동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29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국민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지켜볼 일이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미국 좆은 파병 ‘혹독한 대가’…평화외교 대전환을

[아프간 인질사태가 남긴 과제] 파병정책 전면 재검토


‘테러와의 전쟁’ 동참이 끝내 화 불러
파병동맹 미국 “협상불가” 도움 외면
아프간·이라크 평화 근본적 성찰 절실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태는 한-미 동맹의 성격 및 전망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일부에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에서 한-미 공조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한국군 동의·다산 부대의 아프간 파병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정부는 아프간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구호 및 진료 활동과 평화재건을 지원하는 국제적 연대에 동참해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부대를 파병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현지에서 전투참여 없이 동맹군에 대한 의료·공병임무 지원과 함께 현지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구호활동을 펼쳐왔다. 동의부대는 2002년 9월 파병 이래 24만여명의 환자 진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재건·의료지원단이라는 형식을 떠나, 파병 자체가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 주도의 대테러전에 군사적으로 동참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반도 방위를 위한 상호협조 차원에서 비롯된 한-미 동맹의 외연을 미국 주도의 대테러전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인질 사태에서도 탈레반은 한국군을 대테러 동맹군의 일원으로 규정하고 철군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는 29일 ‘대테러전 참전의 혹독한 대가와 교훈’이라는 논평을 냈다. 논평은 “아프간의 갈등과 분쟁을 더욱 조장하는 전쟁에 한국이 무책임하게 참전한 결과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이번 사태가 똑똑히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또 “아프간과 이라크 평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대테러전에 동참했던 파병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의도된 정보왜곡은 정부가 철저히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피랍사태 기간에 미국이 ‘협상 불가’를 고수하며 인질 석방을 바라는 한국 정부와 가족들의 애타는 심경을 외면했다는 비판론도 있다. 미국이 이번 인질 석방 과정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한국 정부가 탈레반 쪽과 직접 대면협상을 하고 이슬람권 국가들에 대해 전방위적 외교를 펼친 것이 큰 효과를 본 것은 분명하다. 결국 한-미 동맹에 묶인 한국의 기존 외교가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현장교훈을 얻은 셈이다. 반면 보수세력 사이에서는 한국 정부가 탈레반과 대면협상을 하고 일찌감치 철군을 못박아 한-미 동맹에 균열이 생기게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는 앞으로 이라크 자이툰부대 파병 연장 및 아프간 지방재건팀(PRT) 파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둘 다 미국의 요구로 한-미 동맹 차원에서 검토되는 사안이다. 김형기 국방부 홍보관리관은 아프간 지방재건팀 파견 여부와 관련해 “피아르티 참여는 이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논의된 부분”이라며 “앞으로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서 검토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과 한-미 동맹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당장 이 두 사안의 진행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강대국 중심 외교…지구촌 지역 전문가가 없다

[아프간 인질사태가 남긴 과제] 이슬람권 이해 전환점 계기


아프간 아랍어 안쓰는데
사태 초기 아랍어교수 찾아
현지 네트워크 없어 고전

한국인 인질 사태가 벌어지자, 정부는 9일 뒤에야 이른바 ‘전문가’를 보냈다. 아랍어 교수였다. 하지만 아프간에선 아랍어가 통용되지 않는다. 파슈툰어와 다리어가 쓰인다. 정부는 얼마 뒤 다른 전문가를 찾느라 허둥댔다. 현지에 한 명의 기자도 파견하지 못하고 사건의 종말을 봐야 했던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번 인질사태는 주요국 이외 지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라마단 등 이슬람권에 대한 이해와 사우디아라비아·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은 인질 석방에 크게 기여했다. 그만큼 특정 지역에 대한 정부·학계·언론계 등 각계 전문가의 중요성은 다시 확인됐다.

하지만 대외정책의 최일선인 외교부만 봐도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중동전문가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탈레반과의 협상을 꺼리는 아프간 정부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고 협상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아프리카·중남미 등 다른 제3세계 전문가도 찾기 어렵다. 아프리카의 한 한국 대사는 “아프리카 국가로 배치될까봐 프랑스어 구사 능력을 드러내길 꺼린다”고 털어놨다.

세계화 시대라고 하지만 주요국을 빼면 각 지역 전문가가 없기는 학계와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학계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들이 즐비하지만, 국립대학교에는 아랍어과가 개설된 곳이 한 곳도 없다. 이른바 제3세계 전문가는 일자리를 얻기도, 학술진흥재단 등의 지원도 받기 어려워 연구 자체를 꺼린다.

언론계도 아랍권 등 특수지역의 현지어를 이해하는 전문가가 없어, 서방 언론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나 독일 관련 기사조차 영·미 언론 보도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 극소수 강대국 중심의 사회적 풍토 속에서 정책적 뒷받침까지 없다 보니까 기타 지역의 전문가를 키우지 못한 것이다.

김계동 국제지역연구소장은 “우리 사회는 일부 지역을 빼면 지역전문가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며 “지금까지는 우리 사회의 경제·사회적 수준이 제3세계까지 신경쓸 수준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대학 등에서 전문가를 키워낼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동정치 전문가인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중동이나 아프간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의 전문가조차 활용하지 못해 초기 대응에 혼선을 빚었다”며 “고시 채용 대신 각 지역별로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외교관으로 선발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비슷한 사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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