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에이즈 옮은 새 남편 끝까지 나를 탓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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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7월4일은 르완다의 인종청소 종식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날 피해자인 데보라(50·왼쪽 사진)와 가산자이레(40·오른쪽)를 만났다. 이들은 르완다 수도 키갈리 외곽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판자촌에 산다. 아이들은 쓰레기가 뒹구는 미로 같은 골목에서 뛰어놀고, 화장실이 변변치 않아 악취는 진동했다. 이곳의 가구당 한달 평균 수입은 5만원도 안 된다. 학살의 잔영이 여전히 드리웠지만, 정은 넘쳤다. 인종청소에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서로에게 의지해가며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 여섯도 죽임당해 총구 사라진 것 자체가 행복”
■ 이젠 슬프지 않아=데보라는 남서부 기콩고로 출신이며, 투치족 농부 가족의 7남매 가운데 셋째다. 그는 7살이던 1963년 성탄절 전날, 후투족 여러명이 집으로 몰려와 아버지를 데리고 간 뒤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인종청소가 갓 시작된 94년 4월11일 그의 남편은 바나나 농장에 숨어 있다가 살해당했다. 가차차 법정에서 후투족들이 칼로 남편의 머리를 두동강냈다고 한다. 후투족들은 13일 뒤 투치족들이 모여 있는 교회당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아이 4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데보라는 “죽어 가던 넷째가 ‘엄마 그들이 나의 머리를 쐈어요. 내가 죽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며 흐느꼈다. 나머지 아이 둘은 그 다음날 난자당해 죽었다. 당시 맏이는 13살, 막내는 생후 26개월이었다.
온몸이 찔려 강에 버려진 데보라는 혼자 사는 후투족 노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 노인은 머리에 구더기가 끓던 데보라를 정성껏 치료하고 석달 동안 숨겨줬다. 유일하게 생존한 조카를 자신의 아들처럼 보살피는 데보라는 슬픈 옛일이 생각나지 않느냐는 물음에 “전혀 아니다. 내게 겨눈 총구가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날마다 행복”이라고 대답했다.
■ 시한부 인생=남부 니얀자에서 태어난 가산자이레는 94년 폭도로 돌변한 이웃 사람들에 의해 결혼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명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만신창이가 돼 삶을 포기하려던 그를 구해준 사람이 두번째 남편이다.
두번째 남편은 자신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겨줬다고 한다. 인종청소 당시 잉태된 아이가 가산자이레의 맏딸이다. 그는 남편과 아이 둘을 더 낳으며 다시 희망을 얻었다.
2000년 봄, 갑자기 몸이 약해진 그는 병원에 가서야 인종청소 당시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도 2년 전 에이즈로 죽었다. 그한테서 감염된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은 끝까지 그를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에이즈에 감염된 게 알려지면 이 동네에서도 따돌림당하게 된다. 큰딸 레티샤는 이미 에이즈에 걸린 것 같다.
돈 벌 길이 없는 그에게 이웃들이 음식을 나눠주며 도와준다. 인종청소 때 친척이 다 죽었으니 자신이 죽고 나면 아이들은 누가 돌볼지, 아이들마저 모두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될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데보라는 가산자이레가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게 됐다. 인터뷰 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들은 떠나기 전 기자에게 “인종청소 당시 우리를 도와준 후투족도 많고, 그러다 동족의 손에 죽은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키갈리/서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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