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흘러
손금도 보고
허니헛의 왠만한 음료수도 다 섭렵하고
그곳에 있는 론리 플레닛 및 오쇼관련 서적도 거의 다 보고
옆방의 이도도 떠나갔다.

그리고 잠깐 정말 차가웠던 아이슬랜드 커플 도 떠나고
우리의 이웃에 새로운 커플이 등장했다.

미국에서 요가 선생님을 하는 네덜란드인 여자와 부자 아버지를 두어(?) 인도를 여행하며 방랑하는 인도인 남자.
어딘가 통하는게 비슷해서였던지 우리는 친하게 지냈고
덕분에 무료로 요가 강습도 받고 그들이 찾아 헤멘 좋은 아슈람도 가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이 상업적인 이곳 아슈람들에 비해 덜 알려지고 돈도 따로 요구하지 않으며
수련도 많이 해서 예전 미국인가 영국 다큐 프로그램에 소개도 됬다던 한 할아버지께서 운영하는 아슈람.

그들이 이 아슈람에서 묵는다기에 그냥 구경삼아 몇일 따라갔는데
이곳에서의 2일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무엇보다 결혼
그리고 전등축제
프라나야마를 배운일
마지막으로 뎅기열 모기에 물린일!

이들이 네팔로 떠나고 우린 사실 이 아슈람에서 몇일 묵으면서 프라야나마를 더 배우기로 하고
그동안 있었던 코태지 정리를 하면서 리쉬케쉬 시내쪽의 갠지스 강쪽으로 놀러간적이 있다.
사실 유스케의 강사랑에 그가 강에서 목욕을 하는동안 난 돌아다니며 애들이랑 놀거나 예쁜 돌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서 있는 바로 앞 큰 돌 위로 한 할머니가 올라 서더니
나를 보며 뭐라고 뭐라고 하셨다.
난 조금 무서워져서 자리를 피했는데 그 할머니 계속 내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며 중얼대신다.
괜히 일을 연결시키는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날밤, 코태지로 돌아와서 우리둘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고열이 몇일 계속 될 때는 잘 몰랐는데
3일 뒤 손부터 시작해서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부으면서 너무 간지러워 잠도 잘 못자는데
아율베딕 의원에 가서 간(=피, 아율베딕 원리와 중의 원리는 비슷한점이 참 많다. 맥 짚는것도 그렇고)보충을 하는 약을 지어왔지만 결국은 하루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갔다. 그런데 하필 휴가철이라 아픈몸을 질질끌고 피검사받으러 한참 돌아다니고 밥도 제대로 못먹고 해서 지칠대로 지치고 짜증나고... 그런데 신기한건 내 몸이 계속 버텨줬다는거다. 하지만 처방받은 약은 엄청 독한 항생제 및 출처를 알수 없는 알록달록한 무지막지한 양의 알약들. 하루종일 아픈몸을 질질끌고 가서 얻은 알약들은 나는 그냥 고스란히 쓰레기통으로 옮겨놓았다. 

집으로 돌아오나 걱정하던 코태지 주인은 우선 기운을 차려야 한다며 코리엔더를 넣은 케챠리(죽)을 만들어 주었다.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점점 기운을 차리고 나중엔 우리가 자주갔던 슈퍼 주인이 소개시켜준의사를 찾아 갔다.
역시나 소문대로 그는 진찰을 하더니 지금 낫고 있다며 다른 의원에서 처방해준 화학 약품들은 절대로 먹지 말고 비타민제(인삼 성분이 든)복용을 권해 주었다.

좋은 의사란
어떻게 보면 간단한건데.
어떻게 보면 또 어렵다.

환자를 돈벌이 목적으로 보지 않는, 그들에게 그들의 증상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고  납득이 간 처방을 내려주는 좋은의사는 참 어딜가나 찾기 어려운것 같다.

아무튼 속시원하게 내 증상을 풀어헤쳐준 그 명의에게 감사를 표하고 돌아와
몇일 쉬고 회복하게 되었다.

몇일뒤 이도가 돌아왔다.
그가 갔던곳은 맥클라우드 간지.
티벳 난민들이 모여사는 , 달라이라마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너무나 좋았다며 꼭 가봐야 한다는 이도의 설득이 먹힌건지,
우리는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신기한건 마지막 인사를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전의 그 템플의 사제가 있는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우리를 바라보며. 이제 떠나면 좋은일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네.. 라고 그랬는데 진짜 그게 마지막이었다는거다. 그땐 몰랐는데... 이거 내가 너무 인도를 미화시켜서 생각하는건가?
물론 여행자가 여행지를 낭만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건 사실이지만
꽤나 오랫동안 묵으며 여행이라기보단 잠시 살았던 이곳에서
나쁜일도 겪었지만 사람들이 인도하면 떠올리는 신비한 일들도 많이 겪었다.
그 할머니가 뭐라고 한걸까?
그리고 강가에서 본 한 할아버지의 눈빛,
우울한 마음으로 집을나와 방황하는 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던 두 거지 아저씨의 푸자

정신적인 그 무언가는 존재한다는걸 느꼈다





 

우리가 찾아가서 많은걸 얻었던(뎅기열포함) 산속의 아슈람


빛의 축제.밤까지 상점들이 전등을 밝힌다

양초 만들기

 

아슈람안에서 작은 푸자

신성한불. 불에게 먹을것(태울수 있는것)을 주면서 만트라를 외운다 옴 불부 바스바~

가게를 꾸미고 있는 상인들

언제한번 각나라 고유의 귀신에 대해 얘기했는데 일본엔 갓빠라는게 있다고 한다. 열심히 그리면서 설명하는 유스케


등불축제날. 모든 상점은 장식을 하고 등을 켜 놓는다. 골묵 구석구석까지 촛불도

 

 

 

뎅기열.

락슈만줄라의 다리

손이 빨개지면서 부어오르기 시작. 나중엔 간지러워서 잠을 못잘정도

석양

안녕 리쉬케쉬

마지막으로 리쉬케쉬의 명물인 쵸티왈라 아저씨

락슈만줄라 다리 위에서 폭죽을 터트리며 잠시 묵었다. 이때부터 폭죽소리에 위장까지 멍멍

뒤에서 불쇼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은 같이 좋아하는 사람도, 성급히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다. 지역축제지만 조금은 민폐인건가

두손을 들고 흔드는 스타일의 인도 댄스!

폭죽때문에 자욱하다. 아슈람에서도 폭죽

다정한 인도인들. 서양의 시각으로 보면 게이나 레즈비언같은 행동도 친구끼리 서슴치 않는다

바닥이 색깔 분말로 온통 분홍색이 되었다

색깔분을 바닥에서 긁어 모으는 어린이. 인도 아이들은 말라서 그런지 다리가 참 길다.

이곳은 여자들이 모여 춤추는곳

행렬은 점저 갠지스 강을 향해 가고 있다

신성한 불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는 이때쯤 폭죽+북+가루날림+춤때문에 정신이 없었음

갠지스강에서 아이를 씻기는 한 어린이. 강물은 살짝 분홍빛이 된다

가네샤부터 강으로 출발

멀리 레프탕하는 무리들이 구경하고 있다.


 



채식마을인 리쉬케쉬에서 일주일간 유독 사람들이 수척해진다.
두르가 페스티발이라고 하루하루 다른 여신(결국 두르가)을 기리며 사람들이 금식을 하는 기간이다. 물론 저녁때 과일과 음료는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금식은 금식이라 사람들은 점점 조용해진다.
그리고 두르가 페스티발의 마지막날, 그동안 신전 옆 광장에 모셔두며 밤마다 파티를 벌였던, 그 두르가 상을 갠지스 강으로 떠내려버리는 날이다.
사람들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춤추고 북을치고, 축복의 가루를 뿌려댄다.

내가 이 페스티발에 대하여 처음 들은건 유스케의 친구 마유의 음악학교에서다.
사리를 입고 푸자에 참여하고 매일 프라삿을 먹는 일본인  마유는 뼛속까지 힌두느낌이다. 그녀도 이번에 금식을 하는데 참 수척해져가는게 딱했다.

그리고 이 마지막날의 축제는 사원의 한 제사에게 들었다.
그냥 어느날 마음이 울적해서 혼자 산책하고 있었는데 신전 앞에서 한 사제가 날 불러서 근심이 있는거 같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간 곳은 원숭이 신 하누만의 동상 앞. 나에게 하누만의 이마에 손을 짚으면 근심이 없어질거라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나와 하누만을 남겨두고 나가버렸다.
처음엔 약간은 키치하다고도 할 수 있는 동상 앞에서 살짝은 웃음도 났으나
결국 중요한건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참을 그렇게 하누만 앞에 서 있다보니 저절로 마음이 가벼워지는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니 그 사제가 웃으며 내일 두르가 페스티벌이 있을꺼라고 알려줬다. 사실 상업적인면이 있을꺼란 기대에 그래도 마음이 평안해 졌으니 단돈 10루피라도 기부하려고 했지만 그 사제는 우리 사원은 강제로 기부금을 강요하진 않는다며 다만 내일 그런 축제가 있으니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해 준다.

그리고 다음날.
사람들이 모이고
춤을 춘다.
음악과 폭죽
그리고 색 가루를 뿌리며 서로를 축복해주는 사람들
뛰어다니면서 가루를 뿌려대는 아이들
그리고 오토바이 사고

나중엔 쩌렁쩌렁 울리는 폭죽과 북소리에 뱃속까지 울려 조금은 힘들었지만
끝까지 두르가 동상을 따라다니며
그들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네샤동상부터 하나씩 무대에서 내려서 수레로 실어진다

나중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좀 다쳤는데 저 오른쪽에 나온 노란옷의 유럽인이 '인도는 더러우니 주의해야 한다'며 소독약을 발라줬다. 그의 말이 맞는것 같기도, 수많은 인도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게 틀린것 같기도. 아무튼 고마운 1인

두르가는 떠나기 전에 사람들이 만세를 외친다

두르가를 옮기기 시작

텅빈 무대. 아이들이 뭔가 기다리고 있다

저기 이마에 주황색 표시를 한 사제. 전날도 날 도와주고 나중에 댕기열 걸렸을 때도 치료해준 고마운분!

아이들은 처음엔 이렇게 비닐에 담긴 색 가루를 사용했다

점점 색이 입혀지는 아이들

믿음이 깊은 신도인지 두르가 앞에서 한참 저렇게 두팔을 벌리고 뭔가 외친다. 내가 사진을 찍자 주변 사람들이 보라고 하고 그는 나를보고 활짝 웃어줬다

북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리고 아이들이 색가루를 뿌리면서 뛰어놀기 시작


진짜 이곳에서 우리가 무얼하며 2달이나 보냈을까..
이곳저곳 아슈람을 둘러봤지만 빡빡한 스케쥴과 약간 상업적인 분위기에 요가를 따로 배운것도 아니고
시타르나 타브라도 비싸다고 안배웠다.

그대신 유스케는 어쿠스틱기타로 시타곡을 완성했고
난 그림을 그렸다.

슬슬 추워지는 시기. 모기도 많지 않았고 밤이면 반딧불들이 그리는 불빛을쫓았다.
코태지 1층에 이름이 굉장히 긴(브라흐마 어쩌고저쪄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지(인도에서 존칭 미스터 정도의 의미?) 라고 불렀다) 수행자가 있었는데 타브라를 가르치며 돈을 벌고 살고 있었다. 이곳 인도인들은 요가를 가르치거나 전통 악기, 점성술, 요리법등 인도문화를 외국인들에게 가르치며 돈을 번다. 비틀즈의 영향으로 인도 문화(구체적으로는 요가)를 배우러 오는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은 상업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친해지고 나면 귀여운 인도인들이다.
아무튼 그 수행자가 하모니움(약간 아코디언 스타일의 건반악기)를 연주하고 그의 제자가 타브라를 연주하면 유스케는 다시 튜닝한 기타로 연주했다.
밤마다 이곳에 머무는 두마리 떠돌이 개 커플과 함께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가끔은 집주인과 청소하는 분이 몰래 구한 닭고기도 얻어먹으면서(리쉬케쉬는 채식마을이라 고기를 구하려면 릭샤를 타고 30분정도 나가야 한다. 채식이 지겨워서 한번은 고기를 구하러 고기파는 마을에 갔는데 기분때문인지 리쉬케쉬와 다른 기운이 도는것 같았다.) 나는 그림을 그렸다.
한동안 원숭이 투성이인 다리를 건너기가 무서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리도 건널 수 있게 되었고 여기 도착해서 펑펑 울면서 바라보았던 불이켜진 아슈람도 둘러보게 되었다.
헌책방에서 책도 사서 읽고 (홀리카우랑 탄트라, 그리고 샤크라 핸드북)
옆방을 꽤 오래 쓴, 나중에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인 작가와도 친하게 되었다.
유스케는 나중에 마유의 아슈람 푸자에서 기타를 들고가서 일본노래도 불렀다. 그날 쩌렁쩌렁 울리는 마이크속의 일본어에 그 아슈람의 일본인들은 의아해 했을것 같다.
지금 이렇게 회상해 보면 참 많은 일을 했는데
막상 사람들이 리쉬케쉬에서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 뭐했어? 하면 뭐라고 대답을 못하겠다.

식빵을 사서 아침에 바나나와 뉴뗄라를 발라 먹었다. 아침식사는 유스케가, 차이는 내가 끓였다

반딧불이 우리방에 들어왔다!

원숭이 얼굴모양 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내가 계속 그린 화분

가끔 검은얼굴원숭이가 산에서 내려온다. 뒷문을 열어놨더니 바나나도 훔쳐갔다! 감자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한입먹고 맛이 없었는지 버리고 간것 같다. 이빨자국을 남기고.

유스케는 티벳 Singing Bowl을 샀다. 노래하는 그릇? 나무 봉으로 한번 치고 윙윙 돌리면 그릇이 울리면서 소리를 낸다. 7가지 다른 성질의 금속으로 만들어져서 명상하는데 좋은 진동소리를 낸다고 한다. 반찬 하나도 1루피도 아끼는 유스케지만 이건 비싼데도 선뜻 사서 매일아침 명상할때 써먹었다.

강 건너엔 볼게 더 많다. 소들도 많다. 갠지스 강을 바라보고 있는 소

비록 원숭이공포증은 작아져서 다리를 건널 수는 있었지만 왠만하면 원숭이가 없는날을 골라서 건넜다. 소도 다리를 건넌다.

강물이 마른곳에서는 돼지들이 산다. 새끼돼지가 너무 귀여워서 보고 있으니까 돼지치는 아이들이 달려나와서 같이 놀았다.

 

 

리쉬케쉬 시내를 돌다가 우리 밑층 '지'를 닮은 소를 발견하다. 크고 검은 눈매가 너무 비슷하게 생겼다

이제 물이 어느정도 줄어든 갠지스 강


리쉬케쉬
우리가 도데체 뭘하면서 여기 이렇게 오래도록 있었나...

아무튼 유스케가 레인보우게더링에서 만난 친구가 여기 아슈람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나름 호텔식 괜찮은 방에 끼니도 무료! 자유 시간에는 타브라나 시타르등을 배울 수도 있었지만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서 사전 예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패스

하지만 아슈람 뒷길 갠지스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건너편의 다른 아슈람건물을 보았는데
한참을 보고 서있으면서 여기서 당분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여기서 타브라라는 인도 전통북을 배우는데 찾아가서 하루종일 음악을 듣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호주 아이의 추천으로 락슈만줄라에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숙소를 찾아헤메던 그날은 내 인도 여행중에서 가장 우울한 날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우울증에 징징대고 그래서 유스케는 지치고 또 난 나를 돌봐주지 않는 느낌에 더 우울해지고. 아...
결국엔 다리를 건너려다 원숭이에게 물렸다. (사실 나와 원숭이와 우산 이 세가지 요소는 그다지 좋은 조합이 아니다. 예전 남산동물원에서 우산쓰고 원숭이 구경하다 원숭이랑 우산으로 싸운일도 그렇고.. 이날도 다리를 건널 때 너무 더워보여 우산이라도 쓸까 해서 가방을 열었는데 원숭이가 공격! )

우울할 때 원숭이에게 물리면, 또 그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게 된다.
당황항 유스케는 그냥 나를 내버려 두었고
주변 인도인들이 와서 무슨일이냐며 걱정해주었다. (남자의 관점에서 보면 참 나도 나쁜 여자친구지만 그 땐 정말 너무 미웠다. 주변 걱정해주면서 병원 가보라고 한 인도인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간 병원.
그동안 깎고 깎은 저렴한 숙소, 길거리 음식으로 아낀 돈들이 다 주사비로 나가버렸다.
근데 막상 병원에 가보니 나보다 심하게 물린 사람들도 있더라.
광견병예방주사
적어도 3번까진 맞아야 한단다.

그날 첫 주사를 맞고 숙소로 돌아오다.
하루에 70루피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주변에는 나무로 둘러싸인 산속의 작은 코태지.
이곳에 도착해서 우선은 이런곳에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야하는게 맞는거겠지만
도착해서부터 3일정도는 펑펑 울었다
왜 울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그냥 펑펑 울었다.
특히 밤에 강건너 푸자의 불빛을 보면서 베란다에 앉아서 한없이 울었다.
벽에걸린 터번을 쓴 사진을 보고도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또다시 왜인줄은 모른채로 다시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인도의 좋은점은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대로 놔둔다는 점이다.
내가 펑펑 울고 있자 그 코태지의 주인이 처음엔 걱정하는 눈빛이었으나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기분이 나아지자 전에는 아무일도 없었던것 것처럼 그냥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져서 몇일동안 울어대는 버릇은 중국에 있을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혹은 과도하게 날 걱정할까봐
그냥 묵묵히 있다가 그들이 없을때 혼자서 울곤 했다.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아무튼 인도에서 펑펑 울어댄 이날 후 갑자기 우울해져 울어대는 날의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리쉬케쉬 시내에서 다리를 건너서 한시간 정도 가면 람줄라와 락슈만줄라. 처음엔 한시간정도 걸려서 걸어다녔는데 나중에는 쉐어10루피를 내고 릭샤를 탔다

이때 비로인해 강물이 아주많이 불어있었다. 델리에서 리쉬케쉬로 못간다는 뉴스도 있을정도로. 비로 불어난 강물은 아주 빠르고 무섭다

갠지스 강가의 시바신과 그의 부인 파르바티, 그리고 그의 자가용(?) 하얀암소 난디 조각상

강물이 불어나 가트에도 물이찼다

인도인들이 신성시하는 갠지스강. 인도각지에서 모여든 여행객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면서 조금씩 갠지스강을 접하며 힌두문화를 가르친다

거의 아물어가는 원숭이가 문 자국. 신기하게도 원숭이 얼굴모양으로 자국이 남았다. 이걸 코태지 주인에게 보여주니 그 조용한 사람이 껄껄대면서 웃었다.



신의 문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하리드왈은 사실 인도인들에게 더 유명한 명소이다.
갠지스 강이 시작된다는 지점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리드왈을 찾는 인도인들과
우리처럼 이곳은 가볍게 패스하여 리쉬케쉬로 가는 외국인으로 붐볐다.

밤에 도착해서 빨리 무거운 짐을 풀고 쉬고 싶었으나
역시나 알뜰한 유스케는 뒷골목으로 들어가 200루피짜리 방을 하나 찾아냈다.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집저집 가격흥정이 시작하는데
우리가 찾아본 숙소 바로 앞 호텔의 주인까지 나와서
우리를 설득했는데
참 귀여웠던게,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는 잉글리쉬 토일렛이야!'
라고 해서 깔깔 웃으면서 잉글리쉬 토일렛? 토일렛이 영어를 해?
하니까 정말 당황한 표정으로 아니.... 유럽식인가.. 그 앉는거 있잖아
하면서 돌아간다.
말장난.

아무튼 하리드왈에서 하룻밤은
지치지만 다음날 리쉬케쉬를 생각하며
푹 쉬었던것 같다.

다음날 기차역 앞편에서 탈리를 먹고
바로 건너편 파란 오토릭샤를 타고
리쉬케쉬로 향했다
(사람들이 아무거나 파란색 버스를 타라고 해서 처음엔 황당했었는데
그 길가에 서서 리쉬케쉬를 외치면 알아서 다 나타난다. 릭샤 하나를 다 빌리면 몇백루피
하지만 쉐어해서 40루피. 만약 정말 낑겨서 타고 갈 자신이 있다면 중간에 20루피 부르는 차도 있었다.
한 한시간정도 걸리고 가는길에 길가의 원숭이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는.

리쉬케쉬에 도착해서 또 뒷골목으로 가서 만난 삐끼(왠만하면 삐끼를 잘 안따라 가지만 이 사람은 참 선해보였다. 인상이. 나중에 돈도 요구하지 않고..나한테는 잘 여행하라고 예쁜색의 돌도 선물로 주었다) 프라빈.
그를 따라 정말 저렴한 가격에 (150루피!) 방을 구하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전기가 잘 끊겨서 팬이 작동했다 말았다 한다는것.
나중에 내려와서 호텔 주인이랑 수다를 떨었다.
역시나 요가의 고장이라 그런지 거드름 필것 같던 사장이 막 요가 포즈를 취하며 자기는 이런포즈도 한다며 자랑.
나중에 알고 보니 건너편에서 스테인레스 그릇가게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욕심은 많이 없는지 그냥 앉아서 노닥거리고 우리 오면 막 공짜로 묵으라고 하고
참 귀여운 사장님. 사장님은 참 좋았으나 도심(?)과 가까워 너무 시끄러웠던 관계로
락슈만줄라나 람줄라로 가기로 결정


림카. 동생이 한국의 어떤 노래에서 인도사이다가 나온다고 했는데 이건가.. 참 알티피셜한 라임소다맛

역시 하리드왈. 곳곳에서 신상이나 제단이 보였다

처음 보게된 갠지스 강. 이때까지만 해도 괜시리 설랬었는데...

길가에 나와있는 원수이 가족들. 이때까진 참 신기하고 귀여웠었는데..

리쉬케쉬 도착해서 앞으로 어딜갈까. 우리에게 있었던 유일한 지도+ 관광안내서

우리가 묵었던 친절한 사장 호텔 좀 앞길에 큰 쓰레기 매립장. 여기서 소들이랑 돼지들이 쉬어간다.




리쉬케쉬로 가려면 먼저 하리드왈로 가야 한다.
드디어 뉴델리 떠나는 날!
짐을 다 챙겨 릭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갔다. 기차역까지 20루피. 하지만 짐이 많았으므로 편하게 갔다.
(릭샤에서 내릴 때 날 번쩍!)
결국 뉴델리에서 부츠도 못구하고 버터치킨도 못먹었지만, 리쉬케쉬홍수에 대해서 뉴스에서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떠나는건 너무 좋았다.
얼마나 좋았냐 하면 우린 무려 기차역에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무거운 백팩때문에 어디 가기도 귀찮고, 그냥 그렇게 기차역에서 1시간동안 사람들 구경을 실컷 했다.

기차역. 사람들 생긴것+전통복장만빼면 완전 중국이다.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 짐....

왼쪽에 옅은 밤색입은 겨알같은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줄을 잘 안서는 사람들(혹은 티켓이 없는)을 잡아냈다. 몽둥이 한번 휘두르니 줄이생기고,무질서함보다 이들이 사람들 이렇게 대해도 되나, 놀랐다.

기차 문이 열리자 막 들어가는 사람들. 이사진 찍기전에. 무슨 콘서트현장처럼 저 서있는 사람들 위로 한 사람이 눕혀져 들어감. 사진엔 그의 뒤를 따르던 짐만 나왔다 ㅠㅠ

계단에 앉아있다 플랫폼으로 내려가고, 유스케가 바나나를 사러가자 혼자남은 나에게 주변의 인도사람들이 궁금한걸 막 물어봤다.(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막 물어보고 싶어해서 저 두 안경쓴 분들이 해석해줬다. 인도에선 왠지 길 물어볼 때 안경쓴 사람이라면 한 90%는 영어를 하는것 같다)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부터 하리드왈의 뜻(신의 문이라는 뜻이라고 함, 갠지스 강의 상류, 시작 되는곳)연락처 교환까지. 나중에 유스케가 돌아오자 음악 얘기가 나와서 유스케가 기타를 꺼냈다.

음악에 몰려든 사람들. 저 왼쪽의 하얀옷 입은 청년은 캘커타에 산다고 나중에 캘커타 가면 연락하기로 했음.




지금 생각하면.
인도 여행에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한게 정말 아쉽다.
지금 보면 남는건 사진뿐이라지만
내 가슴속에 남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언제라도 금세 기억 날 수 있도록
사진을 많이 남겨놓았으면 좋았을 걸....은
여러가지 많은 일들 해프닝에 카메라 들 생각을 겨를도 없었던 그 당시의 나에겐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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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카레냄새.
각 나라마다 고유의 냄새가 있다고 하는데(우리나라는 공항부터 마늘 냄새가 난다고 누가 그랬는데..)
인도는 역시나 강한 카레냄새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레+코리엔더+샌달우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화물찾는곳에서 땅에 털퍼덕 앉은 한 여인이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인도를 갔다 온, 오랜시간의 여행자들이 다들 그렇듯, 그녀도 경계없는, 약간 풀린 커다랗게 뜬 따뜻한 눈길을 가지고 있다.
눈빛을 읽고 나도 미소로 회답해 주었다.
나오자마자 우린 덩그러니 차가운 느낌의 공항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가르쳐주는 총든 군인들의 지시하에 바로앞에 있었던 ATM을 찾아 왔다갔다 거렸다. 7년전에 인도에 와봤다던 유스케는 많이 바뀌었다며 놀라워했고, 나의 상상과는 달리 (공항 안의 여러가지 손모양의 조각들이 있었는데 그것 빼고) 너무 현대적이고 사람들만 빼면 인도란 느낌이 없는 공항에 약간 실망을 했던것 같다. (난, 조각된 대리석, 향 등등의 타지마할 같은 공항을 상상했었다)
준비성없기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점은 똑닮은 우리 둘은 돈 개념을 몰라 우선 500루피만 뽑기로 하고, 마침 아까 눈인사를 한 그녀와 택시쉐어로 메인바자까지 가기로 했다.(택시한대에 330루피. 정부에서 한다는거길래 탔더니만 나중에 보니 정부가 돈버는거였음. 나중에 올 때는 메인바자에서 공항까지 230에 감)
그렇게 택시(라기보단 작은 봉고+툭툭의 하이브리드 같았지만)을 타고 도로를 달리는중에 아까 그녀의 론리 플래닛을 빌려봤다. 음. 100루피에 2.5달러. 이정도면 나쁘지 않네.
솔찍히 메인바자 도착전까지. 살짝 실망스러웠다. 도로가 마치 우리나라 인천공항 도로같이 잘 닦여 있어서, 그냥 여기도 어디나 있는 그런 도시일까봐.
하지만 메인바자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이런 걱정은 길을 막고 있는 소떼, 혹은 칭칭거리는 릭샤에게 비키라는 차들의 빵빵소리와함께 짜릿하게 부서져 버렸다.
메인바자.
택시기사와 연줄이 있는지 그는 우리셋다 몽땅 하레 크리쉬나라는 '론리플래닛 추천'한 게스트하우스 앞에 내려주고
유스케나 덧치녀완 달리 인도가 처음인 나는, 신나기도, 여기저기 나는 소리들에 정신없기도 해서 그냥 그들을 줄줄이 따라갔다.
400루피.
그녀는 이 가격에 항복했고 자랑스런 유스케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다가 결국 그들이 제시한 마지막 가격 300루피보다 훨씬 싼 200루피에 다른곳을 가게 되었다.
우릴 안내한 삐끼소년은 네팔에서 건너온 18살(이라곤하지만 뻥인것 같음. 많이봐도 한 15살 됐을까)짜리 아이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꼬마들이 싸우면 중재해주고 애들이 반가워서 따라오면 미소로 다 받아주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샨티샨티한 아이였다.
핫샤워를 하려면 엑스트라챠지가 붙는다는것 빼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방.
짐을 풀고 나와 밤거리를 걸어다녔다.
아까완 달리 무서움.
비가오고 난 뒤라 그런지 땅은 군데군데 진흙탕에, 콘크리트, 철근이 다 드러난 반은 부숴놓은 건물들, 바빡 마른소들과 사람들 눈치보는 떠돌이 개들, 무엇보다 대놓고 손가락질하거나 우릴보고 웃고 장난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도 아니면서 아이들같은 어른들.
유스케가 같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그렇게 한 5분을 걸었나, 
무서움이 가시더니 이젠 막 이해할수없게도 머리위에서 바람이 새는 느낌과 함께 이상한 감동이 마음속에서 스물스물 나오기시작하더니 눈물이나기 시작했다.
괜히 나의 상황이 이들보다 낫다는 자만감에서 나 온 측은지심,이렇게 살면서도 밝게 사는 그들의 사랑스러움, 이들을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다는, 허세투성이 여행자의 마음? 이런것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어떻게 보면,지금생각해보면, 거짓눈물.(왜냐면 난 내 이익이 걸린 문제에선 다른사람은 뒷전인 역시나 하나의 이기적인 인간인걸 알기에).
하지만 그때 어둡고 축축한 밤길을 걸으면서 느낀 감정 변화의 종착부분은 (신남->복잡함->무서움->감동->행복) 지금 생각해도 무언가 특별했던것 같다.

잠시 산책 후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한번 유스케에게 너무 고마웠다. 보호받는 느낌이야말로 두려움에서 가장 빨리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감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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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어나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어제본 풍경엔 빛이 더해져 어젯밤 나에게 찾아왔던 두려움을 모두 쫒아내 주었다.
기차역에가서 리쉬케시로 가는 기차표도 사고(어디서나 인도 공관의 특징:펜 빌려주는걸 자원낭비로 생각하는것 같다. 옆에 있던 여행자에게 빌려 씀. 그리고 표 프린트 해주는 아저씨의 아버지같은 미소. 눈빛.)표사고 나서 역안의 카페테리아에서 20루피도 안하는 탈리와 차이를 맛보고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포장지로만든 종이그릇에 넣어주는 빠니푸리도 사먹었다.
 돌아다니다 이사람들이 얼마나 사기를치나 보려고 기차역 근처의 여행사에 가서 리쉬케쉬가는 기차표를 물어보니, 지금 리쉬케쉬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로 기차가 끊겼다고 한다.(응?) 다른곳도 같은답변. 표를 파는 곳에선 우리가 산 가격의 배는 불러서 기분 좋았지만, 몇 여행사의 홍수 이야기에 걱정이 좀 되기도 하고.
아무튼 뉴델리에 있는동안 비와 진흙(+소똥)에 안되겠다 싶어 비장화를 사려고 컨넛 플레이스까지 뒤졌으나 결국 찾기 어려움(아,,, 난 뉴델리에 다시오면 비장화장사를 하겠어요)
아, 컨넛 플레이스에서,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한 거지가 발가벗고 신문지로 중요부분(=얼굴)만 가린채 대자로 누워있었다. 우린 그 사람이 죽었나 해서 걱정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맞은편의 한 인도인이 그 기다란 손가락을 펴고 우리에게 한마디 하고 가버린다.
"this is our india."




메인바자 거리에서 빠니푸리를 먹다. 비가오면 몇몇인도인들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뒤집어쓴다. 머리통 작아서 좋겠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소그 골목 구석구석을 걷다보면 이런 멋진곳도 종종 있다.

나중에 우리의 단골이 된 한 차이 집. 영어와 힌두어를 같이 써 좋아서 믿을만하다. 차이 5루피

한 어린 학생이 차이를 끓여주는데 할아버지들이 오셨다. 맨 오른쪽 손님 할아버지는 귀도 잘 안들리시고 풍이 왔는지 천천히 움직이시는데 학생이 참 친절하게 큰 소리로 말도 걸어주고,,참 흐뭇했음.

라시 말고 따뜻한 우유. 비와서 살짝 쌀쌀할 땐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 이 풍경이었던 것 같다. 사진은 다음날 길가다 발견한 바짝 마른 하얀 소

소들이 어디서 잘까 궁금해서 한번 따라가 봤다.

소의 집. 쓰레기장! 푹신한 쓰레기들 위에 산책하고 돌아온 소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낮의 메인바자. 이땐 비와서 진흙투성이.

개들도 여기저기


메인 바자에 전날 도착했을 땐
무섭고 사랑스럽고 감동스럼고
만감이 교차해서 울었는데
다음날 비개인 거리를 보니
다시 현실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빠니푸리를 파는곳에 있던 우리나라 축구 응원복 입은 아저씨. 네! 아저씨 찍는거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