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시아 네트워크/ 아시아의 애국주의- 타이] 캄보디아·라오스·버마 끝없이 깎아내리는 역사 교과서 기술

아누웡왕 평가 둘러싸고 서로간의 불신 극에 달해
▣ 방콕=나빠 홍똥(Pennapa Hongtong)/ <네이션> 기자 “시 아라이 콘 타이 끄리에드 티 숫?” 이것은 타이 수수께끼로 “타이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깔이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해답은 시 댕(붉은색)도, 시 키에우(녹색)도, 시 담(검정색)도 아닌 시 아누크(Sihanouk)다.

캄보디아의 증오, 타이 대사관에서 불타다

타이와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의 전 국왕 시아누크가 들어간 이런 시시껄렁한 수수께끼를 나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풀면서 자랐다.


이런 우스개들은 크메르(캄보디아)를 ‘믿을 수 없는 이웃’으로 여기는 타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이런 경향성은 타이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반드시 배우고 넘어가야 하는 나레수안(Naresuan)왕이 남긴 유산이다.

16세기 아유타야 왕국(타이)이 버마로부터 침공당해 혼란한 틈을 타 크메르 사타(Satha)왕이 쳐들어왔는데, 그 복수로 나레수안왕은 크메르 수도 로웩을 공격하고 라웨악(Laweak)왕을 참수해 왕의 피로 발을 씻었다고 한다. 저명한 타이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꿀(Thongchai Winichakul)은 이런 역사가 “이웃을 헐뜯는 타이식 환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캄보디아쪽에서는 “라웨악왕은 피신한 뒤 탱이라는 곳에서 사망했다”고만 암시할 뿐, 창피스런 왕을 역사 속에 등장시키지도 않았다.

타이 현대사로 넘어와서 가장 도발적인 대캄보디아 ‘저격’은 콤(Khom)과 크메르(Khmer)에 대한 구분인 듯싶다. 타이 버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세계적인 유적 앙코르와트는 타이에 제거당한 문명인 콤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식이다. 콤이 타이에 제압당했다는 ‘설’은 프레아 비헤아르(Phreah Vihear) 유적지를 놓고 두 나라가 소유권 분쟁을 벌이면서 타이 언론들이 대량 살포했다. 그러면서 크메르란 오늘날 캄보디아에 살고 있는 비문명인들을 일컫는 말쯤으로 여겨왔다. 통차이 교수는 콤과 크메르를 구분한 건 “타이 엘리트들이 힌두-부디스트 또는 크메르-산스크리트 가치와 이상(윤회)을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가엾은 이웃에게 제국의 거만함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창안한 ‘작품’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에서는 콤이란 말을 고대 타이와 라오스 사람들이 크메르인을 부른 호칭으로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을 놓고, 타이 사람들이 콤 문명을 찬양하는 한편 크메르를 괄시하는 건 역사의 빈정댐이다. 그러다 국제사법재판소가 프레아 비헤아르(타이쪽에서는 프레아 위헤안으로 부름)를 캄보디아 소유로 판정한 뒤,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 ‘증오’는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여걸’ 타오 수라나리를 아십니까

2003년 1월29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불길에 휩싸인 타이 대사관은 그동안 캄보디아 사람들의 가슴에 맺혔던 타이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준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그 폭동은 캄보디아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한 타이 여배우가 “앙코르와트를 타이에 넘겨줄 때까지는 절대로 캄보디아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떠벌였다”는 소문에서 비롯됐다. 그러자 놀란 여배우가 “죽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는데, 이후 그 폭동이 일어나기 2년 전쯤 그가 한 방송 드라마에서 그런 대사를 읊었던 게 와전된 것으로 드러났다.


19세기 타이 국민 형성 연구에 정통한 통차이 교수는 “이런 일들은 근대에 들어 타이가 과도한 민족주의를 내걸고 국민들에게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믿을 수 없는 이웃’으로, 라오스를 ‘불쌍한 형제’로, 그리고 버마를 ‘못된 적’으로 여기도록 만들면서부터 이미 예견됐다”고 진단했다.

이번엔 라오스쪽으로 넘어가보자. 역사적으로 타이 사람들은 라오스를 ‘농 라오스’(동생 라오스)라 불러왔는데, 이는 라오스를 시암(타이의 옛 이름)의 은혜를 입은 신하쯤으로 여기면서 비롯된 정서다. 물론 이는 라오스쪽에서 보면 당치도 않는 말이 된다. “시암은 라오스 사람들을 노예로 여겨 신분을 구분하고자 문신을 새긴 가혹한 박해자다.” 두 나라 사이의 논쟁과 충돌은 비엔티안의 아누웡(Anouwong)왕이 주제로 떠오르면 극에 달한다. 타이판 역사는 이렇다. “1779년 시암이 라오스를 공격했을 때 비엔티안 마지막 왕의 아들이었던 아누웡을 전쟁포로로 잡아왔다. 이어 1804년 아누웡은 방콕 법정에서 시암의 속국인 라오스를 통치할 왕으로 지명됐다. 아누웡은 시암에 충성을 다하지만 전쟁에서 잡혀온 라오스 사람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요구를 라마 3세(Rama III)가 거부하자 변하게 된다. 아누웡은 자신의 요구를 묵살당하자 1826년 라오스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던 타이 북서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그 뒤 베트남으로 도망친 아누웡을 1829년 타이군이 방콕으로 압송해와 처형한다.” 이 역사 이야기에서 타이 학생들은 또 하나 거대한 ‘여걸’을 알게 된다. 이름하여 타오 수라나리(Tao Suranaree). 1820년대 코랏 부지사의 부인이었던 그는 수많은 여성들을 동원해 반란자인 라오스 군인들에게 술을 진탕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그 틈을 타 잽싸게 공격해 반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다.

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메콩강을 끼고 살아온 라오스 역사에서는 어떻게 기술돼 있을까? 타이가 기술한 아누웡왕에 대한 역사와 정반대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타이 역사가 아누웡왕에게 시암의 인자함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역자’ 꼬리표를 달았다면, 라오스 역사는 그이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민족영웅’으로 모셔왔다.

그러니 아누웡왕의 행위가 타이에서는 ‘반란’으로, 라오스에서는 ‘독립전쟁’으로 엄청난 개념 차이를 보일 수밖에. 물론 여걸 타오 수라나리 이야기는 라오스 역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한편을 놓고 전쟁 직전까지 가 두 나라는 아누웡왕 이야기를 현실 속에서 민족주의 광고용으로 활용해왔다. 라오스는 1984년 타이와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재깍 아누웡왕 전기를 출판해 국민에게 읽히며 젊은이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했다. 타이는 이에 맞서 1년 뒤인 1985년 라오스가 혁명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자 그들의 코앞인 메콩강가에서 여걸 수라나리를 추모하는 대형 행사를 열어 불타는 민족주의 근성을 드러냈다.

2001년 타이가 이 여걸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발표해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만약 그 필름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우린 확실하게 반격할 것이다.” 히엠 폼마찬(Hiem Phommachanh) 방콕 주재 라오스 대사는 일전 불사를 다짐했다.

영화 한편을 놓고 이웃 나라끼리 만들 수 있는 풍경치고는 지나치지 않는가? 그러나 이는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제 <한겨레21> 독자들은 타이에서 누가 왜 그렇게 가장 싫어하는 ‘시’(색깔)들을 만들어냈고, 또 그 ‘시’들이 어떻게 쓰여왔는지를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타이 사람들은 아직도 그 ‘시’를 추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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