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세기를 놀라게 한 백남준의 일생] "예술은 원래 사기치는거야"


[조선일보 이규현 기자]

백남준은 시대를 50년쯤 앞서 살아간 위인(偉人)이다. 지금 현대미술에서 당연시하는 ‘과학과 미술의 만남’을 그는 반세기 전에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물건과 경험이 예술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새로운 장(場)을, 그때 열었다. 유럽인과 미국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작은 나라에서 온 작가였지만, 그가 전시를 할 때마다 세계 미술계는 술렁거렸다. 데뷰 때부터 현대 미술의 여러 흐름들을 이끈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미국 마이애미에서 29일 타계한 백남준은 국적을 초월한, 진정한 ‘월드 클래스 미술인’이었다. 텔레비전과 레이저·인공위성을 붓과 물감·팔레트로 삼고, 전세계를 아틀리에로 꾸몄다.

현재 ‘백남준 미술관’이 경기도 용인시에서 2007년 말까지 완공을 목표로 건립 중이다. 백남준의 매니저 역할을 해온 조카 켄 하쿠다 씨는 30일 본지와 전화에서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전화로 나에게 ‘한국의 미술관은 잘 되어가는가’ ‘꼭 한국에 가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한국에 가고 싶어 했다”고 전했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존 핸하르트 수석큐레이터는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뒤 본지와 전화로 “백남준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조각, 설치, TV 프로젝트, 비디오 등 수많은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였다. 그의 창의력과 철학은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헌사를 전해왔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2000년 백남준의 회고전인 ‘백남준의 세계’전을 열었을 때 토마스 크렌스 관장도 “백남준은 지난 세기 미디어 예술에 심오하면서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 전시에서 백남준은 나선형으로 높게 솟은 내부 공간을 어둡게 한 뒤 레이저를 위아래로 쏘는 작품을 펼쳤다. 겹겹이 휘어지는 복도를 따라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그의 비디오 대표작들이 둥지 틀 듯 자리를 잡았다. 세계 화단은 “그의 작품들이 지난 세기에 이어 새 세기에도 세계 미술인들을 놀라게 했다”며 극찬했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 왼쪽 부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의 예술혼은 한번도 식을 줄을 몰랐다. 불과 15개월 전인 2004년 10월에도 그는 뉴욕 소호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피아노에 물감을 칠한 뒤 힘껏 밀어버리는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을 했다.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음악가였다. 백남준은 58년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할 때 그를 만났고, 60년대 초에는 전위 예술가인 요제프 보이스를 만나 그와 함께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했다.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건 탈(脫)장르 예술운동이었다. 백남준은 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이미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자리를 굳힌다.

그는 과학의 힘을 예찬한 예술가였다. 1984년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과학이 세상을 얼마나 밝고 아름답게 만들 것인지를 증언하고자 했다. 그 작품은 인공위성으로 서울-뉴욕-파리를 동시 연결하는 거대한 TV쇼였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에서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사회를 어둡게 그렸지만, 백남준은 이를 거부하며 “발달된 과학기술이 전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작품으로 웅변했다.



백남준에게는 삶 자체가 예술의 질료였다. 그는 모든 소재를 늘 참신한 예술의 형태로 만들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재활하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 ‘성적 치료(Sexual Healing)’를 2003년에 뉴욕 맨해튼에서 선보였을 때 그는 “인생 자체가 예술”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열여덟 살에 고국을 떠났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사용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고국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의 비디오 속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이미지에 김소월의 시구가 섞여 있고, 퀴리 부인정약용·허준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렇게 56년이 흘렀다. 30일 조카 하쿠다 씨는 “그의 유해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규현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kyu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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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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