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약이 무효! 신종 결핵 나타났다
1944년에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이 개발되면서 인류의 탄생 이래 인간을 숙주로 번성해온 결핵(tuberculosis:TB)은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1950년대에 아이나(아이소니아지드), 리팜피신, 에탐부톨 등 스트렙토마이신보다 더 강력한 결핵약이 속속 등장하면서 인류 최대의 질병 결핵은 영영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결핵균은 죽지 않았다. 음습한 지하에서 변종 괴물이 탄생하는 영화처럼 결핵균의 돌연변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돌연변이는 지금까지 개발된 결핵 항생제로 퇴치되지 않는, 사실상 전혀 새로운 세균으로 탈바꿈했다. 의학자들은 1980년대에야 이 박테리아를 발견하고 ‘다제내성결핵’(MDR:Multi drug resistance-TB)이란 이름을 붙였다.
‘다제(多劑)’(지금까지 개발된 결핵약은 모두 10개)에 ‘내성(耐性)’(저항력)을 가진 결핵균의 등장! 그것은 인류가 결핵약을 개발한 1940년대 이전으로 되돌아갔음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다. 이 돌연변이종을 이길 수 있는 새 결핵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인류는 결핵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2004년에 보건복지부는 “우리나라 국민 중 3분의 1이 결핵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복지부는 “한국인 270명 중 1명꼴인 18만4000명이 결핵을 전염시킬 수 있는 활동성 결핵환자이며, 그들을 통해 매년 약 3만명의 결핵 감염자가 새로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엔 대전과 제주 등 각 지역의 신문들이 “2005년에 새로 신고된 결핵환자가 급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 뉴스는 ‘결핵은 사라진 질병’으로 알고 있던 대다수 국민을 놀라게 했다.
어찌된 영문인가. 한국에서 결핵이란 지난날 흑백사진 속의 질병이 아니었나? 그러나 결핵전문의들의 대답은 태연하면서도 놀랍다. 국립마산결핵병원의 박승규 원장은 “한국에서 결핵이 사라졌던 적은 없다. 한국은 중국이나 태국보다 결핵환자의 비율이 높은 세계적인 결핵국가”라고 말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인체에 주로 증식하는 결핵은 대표적인 후진국형 질병. 그래서 한국에서는 보릿고개와 함께 결핵도 박물관 속으로 들어간 줄 알았다. 비만과 당뇨로 고생하는 영양과잉시대에 몇몇 극빈자도 아닌 18만여명이 결핵을 앓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국립목포결핵병원의 공석준 원장은 “불과 40년 전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의 결핵왕국 중 하나였다. 1960년대에 한국의 결핵환자는 무려 200만명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국민의 살림살이가 향상되면서 결핵환자도 빠르게 줄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결핵환자가 18만여명이다. 결핵이 거의 사라진 줄 알았다면 그것은 결핵의 빠른 감소추세가 지나친 낙관적 인식을 심어준 탓”이라고 말했다.
“결핵에 대한 낙관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착시를 일으킨 원인은 두 가지다. 정부가 국가 이미지를 위해 결핵의 실태를 홍보하지 않은 것과, 남아 있는 결핵환자들이 사회로부터 외톨이가 되기 싫어 병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공 원장은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결핵퇴치 노력이 결실을 얻어 결핵환자는 매년 7%씩 빠르게 줄었으나 1990년대 이후 감소추세가 둔화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최근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오바산조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40년 전 한국은 우리와 다름없는 극빈국이었다”며 한국의 발전상을 부러워했다. 한국은 세계가 놀란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한국인의 인체는 그만큼 고속성장을 이루지 못했나 보다. 박승규 원장은 “한국은 OECD 30개국 중 결핵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다. 그것을 보면 돈은 벌었어도 과연 국민 건강과 삶의 질이 그만큼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30대 이상의 한국인은 누구나 결핵에 얽힌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연말이면 결핵기금 마련을 위해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을 사서 편지봉투에 붙였고 흔히 ‘불주사’로 불렸던 BCG(결핵예방접종) 주사를 어깨에 맞은 기억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국민이 예방주사를 맞고, 이젠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도 없을 텐데 왜 결핵은 줄지 않는 것일까.
그와 관련해 결핵 전문의들은 최근 잇달아 나오는 결핵 관련 뉴스에 “알맹이가 빠졌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국립마산병원 흉부외과 김대연 과장은 “결핵에서 가장 큰 문제가 거론되지 않고 있다. 환자의 수는 핵심이 아니다. 결핵환자가 줄지 않는 이유는 약이 안 듣는 결핵, 항생제에 저항력을 기른 새로운 다제내성결핵이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결핵? “다른 박테리아와 마찬가지로 결핵균 역시 자신을 죽이기 위해 투여된 항생제에 대해 면역능력을 길러왔다. 그런 균을 내성결핵균이라 부른다. 그 중 다제내성결핵이란 지금까지 개발된 10종의 결핵약 가운데 가장 강력한 아이나, 리팜피신에 방어체제를 구축한 결핵균을 지칭한다. 이 두 항생제가 안 먹히면 사실상 박멸할 도리가 없다.” 김 과장의 말이다.
다제내성결핵(이하 ‘내성결핵’으로 약칭)이란 이름의 신종 결핵균의 위험성은 보통 결핵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결핵은 1차 약물치료에서 99% 완치되지만 내성결핵은 2차 약물치료에 수술까지 거쳐도 완치율이 50%에 불과하다. 암이나 당뇨합병증 정도의 난치병인 셈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 에이즈ㆍ결핵 관리팀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내성결핵 환자는 1250~6500명.(환자의 신고율이 낮아 정확한 통계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최소치와 최대치로 추정집계하고 있다. 이처럼 결핵환자는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다.) 완치율이 50%라면 그 중 절반은 평생 결핵으로 시들시들 앓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내성결핵이 발전하면 수명이 크게 단축되며 발병 후 2년 안에 죽기도 한다”고 국립마산병원의 김대연 흉부외과 과장은 말했다.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내성결핵의 존재도 모르고 여전히 ‘결핵은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일부 의사들도 “결핵균은 감기 바이러스처럼 흔한 질병이다. 누구나 쉽게 감염되지만 발병확률은 5~10%에 불과하며 만약 발병하더라도 약만 잘 먹으면 100% 완치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산임을 최근의 결핵 사망자 통계가 증명하고 있다. 작년에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 사망원인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4년에 2948명이 결핵으로 죽었다. 전체 사망원인 중 10위, 전염병으로는 1위다. 2000년에 3413명, 2001년에 3221명, 2002년에 3352명 등 2000년대 들어서만 매년 3000명 이상이 결핵으로 목숨을 잃었다. ‘약만 먹으면 낫는 병’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수는 없다.
“사망의 원인은 90%가 내성결핵이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몸속에 결핵균을 품고 산다. 품고 살아도 발병률이 5~10%에 불과해 평생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성결핵은 얘기가 다르다.” 국제결핵연구센터의 김진희 박사는 “결핵은 평범한 만성소모성 질환이지만 내성결핵은 백약이 무효인 난치성 전염병이다. 결핵과 완전히 다른 질병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염병의 국가적 관리란 곧 환자의 격리수용을 말한다. “내성결핵 환자에게 전염된 사람은 역시 내성결핵균에 감염되며 그로 인해 죽기도 한다. 녀석들은 조류인플루엔자나 에이즈만큼 위험한 전염병이다. 수천 명의 내성결핵 환자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지하철, 영화관, PC방에서 누구나 그들이 내뿜는 균을 들이마실 수 있다. 내성결핵균이 당신의 폐를 파고들 수도 있다.” 김 박사는 굳은 표정으로 경고했다. “정부는 이 난치병에 대해 대책이 없다. 그리고 국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있다. 그 사이에 내성결핵균의 전염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2000년 8월 전북 전주시의 Y(28)씨는 결혼을 앞둔 건강한 여성이었으나 내성결핵에 감염된 지 1년6개월 만에 사망했다. Y씨는 1999년 직장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의 X-레이 촬영을 통해 폐에 결핵균이 침투한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다제내성결핵인 줄 몰랐다. 보통 결핵환자처럼 약물로 치료했으나 폐는 점점 나빠졌고, 10개월 후 국립마산병원으로 가서 진단 받은 결과 Y씨의 몸에 침투한 결핵균은 10개의 결핵약 중 8개에 대해 내성을 가진 중증 다제내성결핵으로 판명됐다. 이미 수술을 받기에도 늦은 상황이었다. 8개월 후 부풀어오른 기관지동맥이 터져서 Y씨는 숨을 거두었다.
“누구든 Y씨처럼 감염될 수 있다”고 의사들은 경고한다. 1250~6500명의 내성결핵 환자 가운데 병원에서 격리치료를 받는 사람은 500명 미만. 우리나라에 있는 결핵병상이 국립마산병원의 512개, 국립목포병원의 314개, 서울 서북병원의 240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병상의 절반 이상은 다제내성이 아닌 일반 결핵환자가 차지하고 있다. 결국 나머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혹은 고의로 병을 숨긴 채) 일반인에게 끊임없이 내성결핵균을 전파하고 있다. 의사들은 그들을 ‘선량한 바이오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그들로부터 감염되는 내성결핵 환자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전국 254개 보건소에서 집계된 통계를 보면 결핵 환자 가운데 전염으로 다제내성결핵에 걸린 새 환자, 이른바 ‘초회(初回) 다제내성’ 환자가 1994년 1.6%에서 1999년 2.1%, 2000년 2.2%, 2003년 2.4%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내성결핵의 전염을 막을 방법은 비교적 분명하다. 결핵전문병동을 만들어 환자가 완치될 때까지 격리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치 않다. 강제적 격리치료는 많은 예산이 필요하고 인권논란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이 병을 잡으려면 국민의 자유를 구속하는 정책을 지지해줄 수 있는 강한 국민 공감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은 내성결핵의 위험성이나 존재마저 모르고 있으니 공감대란 게 있을 턱이 없다.
일본은 인권 논란을 무릅쓰고 결핵환자에 대한 강제적 격리치료를 실시했다. 일본은 결핵환자가 2만8000여명으로, 한국의 7분의 1 수준인데도 1999년에 ‘결핵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국 57개 병원 1만7000개의 결핵병상에서 격리치료를 시행하고 있다. 3개 병원 1000개 병상의 한국과 비교된다. 결핵환자는 완치될 때까지 퇴원할 수 없으며 환자의 치료비와 부양가족의 생계비는 국고에서 지급된다. 일본 결핵연구원의 이사무 수가와라 부원장은 “결핵환자의 자유보다 다수 국민의 생존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합리적 국민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미국 역시 강력한 결핵 퇴치 행정을 펼치고 있다. 미국의 결핵환자는 한국의 12분의 1 수준이지만 보건성의 결핵담당자가 결핵환자의 집을 돌아다니며 약을 먹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도트(DOTS)요법을 실시하고 있다. 뉴욕주를 비롯한 몇몇 주에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제격리를 시행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미국 역시 인권 논란이 있었지만 법안은 통과되었다.
결핵 전문의들이 경고하고 있는 내성결핵이 왜 우리나라에선 한번도 공론화되지 않았을까? 아이가 피부염에만 걸려도 야단을 떠는 한국에서 사망률 10위의 난치병이 간과되고 있다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결핵이 방치된 배경에는 정부와 국민과 의료계의 결핵 기피 정서가 총체적으로 깔려 있다”고 결핵 전문의들은 말한다. 대한결핵협회 김정희 관리과장은 “서울올림픽 때 정부는 결핵이 한국인 사망원인 10위 안에 있는 사실을 국가적 망신이라며 숨기려 했다. 결핵 실태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싫어한 것은 그 후의 정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결핵 관리 예산도 미미하다. 2006~2010년에 예정된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 예산을 보면 암 9300억원, 에이즈 1185억원, 조류인플루엔자 등 신종 전염병 1144억원, 정신보건 1411억원, 구강보건 2076억원에 비해 결핵 예산은 239억원이다.
국민도 전염병인 줄 알지만 바로 전염병이기 때문에 결핵을 숨긴다. 마산병원의 박승규 원장은 친구의 딸이 결핵에 걸린 것을 알고서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친구에게 딸을 입원시키라고 했지만 그랬다간 병력(病歷)이 남아서 결혼할 때 문제된다며 거부하더군요.”
대한결핵협회에는 ‘결핵 홍보를 하지 말라’는 결핵환자들의 투서가 날아든다. “결핵의 위험성이 알려지면 결핵환자가 취직할 길이 없어진다”는 내용이다. 결핵퇴치기금용 크리스마스 실 판매도 이젠 어렵다. 협회는 “국민이 ‘결핵이 지금 어디 있다고 모금이냐’며 사시로 본다”고 말했다.
병원에서도 결핵은 기피병종이다. “결핵은 시쳇말로 돈이 안 되는 병. 약 처방 외엔 수익모델이 없고 만성질환이라 병상만 오래 차지한다. 무엇보다 결핵은 전염병이라 결핵환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 일반 환자들이 기피한다.” 병원에서 결핵병동이 사라지니 결핵전문의 자격증을 따려는 의대생도 당연히 사라졌다. 의과대학의 결핵과와 흉부외과는 미달학과로 전락한 지 오래다. “30대 이하의 젊은 의사 중 결핵전문의 과정을 이수한 의사는 50명도 안 된다”고 한다. 결국 일반 병원 내과의사들이 18만명의 결핵환자를 진단하고 있다. 결핵 전문의들은 “중증 내성결핵은 수술로만 고칠 수 있는데 무효한 약 처방만 내리다가 수술시기를 놓치게 하는 의사도 있다. 또 정확한 결핵약 처방은 객담(가래)검사를 통해 결핵균이 어떤 약제에 내성을 지녔는지 파악한 후에 가능한데 그냥 아이나, 리팜피신만 대충 처방하는 의사도 있다”고 말한다.
결핵정책 수립에 기초가 되는 결핵환자 실태조사는 더욱 한심하다. 1995년 이전엔 5년 간격으로 결핵실태 표본조사를 해왔으나 갈수록 국민참여가 떨어지자 2000년부터 의사의 신고에 기반을 둔 결핵정보감시체계로 전환했다. 그런데 의사들의 신고율이 50%를 밑돌고 있다. ‘결핵환자를 진료한 의사는 1주일 안에 대한결핵협회에 신고해야 한다’고 결핵예방법에 명시돼 있지만(미신고시 벌금 200만원), 병을 숨기고 싶은 결핵환자들이 “허락 없이 정보를 누출했다”고 의사에게 따지는 바람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결핵환자가 공식 통계의 두 배”라는 얘기가 나돈다.
우리나라 결핵의 특징 중 하나로 20~30대 결핵환자가 많은 것(20~39세가 38.7%)도 큰 문제다. 결핵균이 줄어들려면 감염된 노년층이 사망으로 빠져나가고 감염되지 않은 청소년층이 자꾸 유입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박승규 원장은 “불규칙한 식사 등 영양환경이 빈약하고 PC방, 노래방, 영화관 등 밀폐된 공간활동을 즐기는 20대가 결핵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무리한 다이어트가 결핵의 주범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위기와 높은 실업률로 인한 빈곤층 증가, 결핵이 많은 후진국에서 이주해온 외국인 근로자의 증가도 결핵 퇴치에 걸림돌이다.
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