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갑수 기자]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글을 남기고 죽음을 선택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 할 말을 잊는다. 그저 비통, 심란할 뿐. 아찔하고 아득하여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바위에서 뛰어내려 저 세상으로 갔다. 그는 머리에 낭자히 피를 흘리며 심폐소생술을 받다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그는 1946년 생으로 63세의 장년이자, 퇴임한 지 1년여밖에 안 되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부인과 아들딸이 있다. 왜 그는 모진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검찰과 언론의 노무현 죽이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23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대합실에 설치된 TV 모니터를 통해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청와대는 이 소식을 접하고 "참으로 믿기 어렵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애석하고 비통한 일이다.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최대한 하여 모시도록 하겠다"며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빌어 논평을 냈다.

다른 정당들도 청와대와 비슷한,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의 논평들을 냈다. 그런데 그들의 논평 어디에도 노무현의 죽음에 관한 정직한 실체는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노무현이 왜 죽었는지를 말할 필요가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몰아붙이더니 노무현이 끝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노사모도 아니요, 나 자신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도 모르는 내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추구했던 길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에게 검찰은 매일 (언론에) 브리핑하며 먼지를 털었습니다.보수언론은 소설을 썼습니다."( < 한겨레 > 토론방, chris99) 이 누리꾼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는 검찰과 언론이 직결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대검찰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비상회의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간 두 달여 동안 한국의 언론들은 노무현을 난도질하기에 쉴 틈이 없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수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검찰과 언론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전직 대통령을 그렇게까지 무자비하다 할 정도로 까발리고 비아냥거리면서 한 인간을 희대의 파렴치범 수준으로 추락시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CNN 등의 외신은 노 전 대통령이 "이번 수사에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항변을 해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비판에 앞장선 사람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 젊은 검사들과 토론을 벌였다. 그때 노 전 대통령이 검사들에게 했던 유명한 말 "이쯤 되면 막나가자는 거죠?"를 기억하고 있다. 이번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에는 그때 토론 자리에 있던 검사가 참여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번 수사를 받으며 정말 검사들이 '막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기성 정치권과 보수 언론은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에도 그에게 별의별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다. 그를 '개구리'에 빗대기도 했고 '나쁜 대통령'이라고 외마디를 지른 정치인도 있었다. 심지어는 학력 때문에 그를 부당하게 멸시한 정치인도 있었다. 급기야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선거법 위반'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만들어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탄핵 역풍을 맞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일 새벽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검찰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그들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에도 부단히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집요함을 보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말로는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겠다고 해 놓고 국가기록물 건으로 그를 고발했다. 그러다가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과 연루되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들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그를 비판했다.

홍준표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노무현은 전두환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 아무리 노 전 대통령이 못마땅하다고 해도 어찌 사람을 다수 죽이고 수천억 원을 해먹은 전두환보다 나쁘다는 평가를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 중앙일보 > 의 한 칼럼니스트는 "박연차의 돈은 똥인데, 똥을 먹은 노무현"이라는 제하의 글을 쓰기도 했다. < 조선일보 > 의 논설고문은 "노씨, 까불다가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을 받고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온 일을 '정치적 퍼포먼스'였다고 규정지었다.

소환 직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더 이상 없다"고 했던 검찰은 다시 권양숙 여사와 딸 정연씨 등을 부르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검찰은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에게 선물로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다. 또한 검찰은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대한 수사를 강화하면서 노무현에 대한 표적수사라는 비난을 피해 나갔다.

< 조선일보 > 는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의 미국 주택을 호화주택이라고 단정하면서 다시 노무현 공격을 시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 소식이 전해진 23일 오전에도 < 조선일보 > 인터넷판은 아래 기사들을 내놓고 있었다.

- 노정연씨 미국 호화 아파트 파고들수록 수상 - 노정연씨 계약한 미국 호화아파트 가봤더니... - 법조계도 수군, 허드슨클럽 미스터리 증폭 < 연합뉴스 > 는 노 전 대통령이 대형비리가 드러날 것 같으니까 죽음을 택했을 수도 있다는 식의 기사를 내놓고 있다. 대한한국 기득권층의 노무현에 대한 '과장된' 멸시와 증오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죽음을 택한 전직 대통령

"불쌍해서 어떡하나. 그다지 큰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검찰이 압박하니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주부 김모씨(60세))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국민 소감은 대체로 이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기득권층은 여전히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이 대통령과 다른 것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기득권층에 저항하면서 성취했다는 점에 있다.

노무현은 죽었다. 그의 죽음에는 그에게 '막나간다'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를 탄핵했던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 근거 없이 지녔던 멸시와 증오의 감정 따위일랑 모두 살라 없애고 그의 명복을 비는 일에 진정으로 동참해주기 바란다.
[☞ 오마이 블로그] [☞ 오마이뉴스E 바로가기]
- Copyrights ⓒ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Hush little angel, won't you try

The devil hears you when you cry
 
So you can't and you won't
Give up the ghost now
Leave it alone
You know you don't need those lessons
Someone else learned
It's your life it's your right to burn
So you count and discount
All the cracks in the pavement
As you move about
You say that you'll take the push
For the sake of the pull
When you're deaf dumb and blind
Your eyes don't feel the wool
 
And every time it's
Hush little angel, won't you try
The devil hears you when you cry
Hush little angel close your eyes
Think pleasant dreams and truer lies
 
Oh, it's not like those tales of glass and devotion
They like to sell
Oh, you just want to be wanted
It's making you sick
But it's all right
Oh yeah, it's only a prick
 
And that's how you know that it's bad
It's the problem with pain
It's just something to have
Oh, babe you're running the clock
Cuz you can't make it stop
So just sit still and hope the hammer won't drop
 
And every time it's...
 
Hush little angel, won't you try
The devil hears you when you cry
Hush little angel close your eyes
Think pleasant dreams and bluer skies
 
Angel don't you cry



남자는 왼쪽으로가고 여자는 오른쪽으로 가고(남자가 오른쪽이었던가?) 영화 ost.
어느 비오는 날 택시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택시 아저씨랑 막 감동했었던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나라말로하면 회전목마의 종점( 종단? )







출처는 악보속에

 그레코, 〈톨레도 풍경〉, 1595~1600년경, 유화, 121.3x108.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4387.html

뉴시스


"하루를 지내면서 '즐겁다, 즐겁다'하는 마음을 많이 갖고 사는 사람은 얼굴이 즐거운 듯하게 되어 간다.

자기암시에 의해서도 운명이 좌우되지만 주위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쌓여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뀐다."

 

사람의 행동, 그 원동력은 마음이다.

마음은 몸을 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고 행동은 운명을 낳는다.

마음에는 모양이 있고 색깔도 있어서 마음으로 그 사람의 모습이 보여지는데,

오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마음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은 얼굴이다.

자신의 얼굴이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표정를 새기고 있는 마음을 깨끗하게, 아름답게,

바르게, 너그럽게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행동은 마음이 정하는 것이다.

자기의 운명을 지배하려면 먼저 자기의 마음을 지배해야 하고,

작게 보이는 하나하나의 행동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운명을 밝고 즐겁게 하려면 하나하나의 행동을 밝고 즐겁게 해야 하고,

행동을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먼저 밝고 즐겁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에 생각한 것이 형태로 나타나고, 나타난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면

그것이 또 형태로 나타나고, 그것을 또 마음으로 인정하면 그것이 또 형태로 나타나는

같은 일을 되풀이 한다. 이것을 습관이라고 한다.

좋은 습관은 당신을 행복과 풍요로움으로 이끌고 당신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

 

인정하는 것과 좋은 것을 마음에 그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순간적으로 불행하고 어려워도 '나는 행복하다'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에 좋은 씨를 심는 작업이다. (그래서 마음을 복전福田이라 했다)

좋은 말에 의하여 일어나는 좋은 생각은 사람에게 밝은 희망을 준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그것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이 행복의 씨앗이 되어 행복한 운명에 이르게 된다.

 

인생의 근본진리는 '사람은 신(神)의 아들'이라는 것.

신은 우리 각자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해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자신이 신의 아들로서 행복하고, 풍족하고, 건강하고, 머리가 좋은 것이 당연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면 인정한대로 나타나서 행복하고, 풍요롭고, 건강하고, 머리가 좋아지는 것이라 했다.

 

자신에게 나쁜 말이 아닌 항상 좋은 말을 들려줘서 그 말의 힘으로 무한한 능력을 끌어내어

그 힘으로 다시 새로운 행복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소리 내어서 좋은 말은 말을 하면 그것이 힘이 되어 좋은 생각을 낳고,

좋은 생각은 좋은 표정을 만들게 되니 좋은 말, 좋은 생각, 좋은 표정은 삼위일체이다.

 

불교에서도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하여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라 했고

그리스도께서도 기도의 요령으로 '이미 받았다고 믿고 감사하라'고 하셨다.

 

모든 일이 노력만으로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디딤돌이 되는 원리와 법칙을 명확히 인식하고, 마음의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하자.

 

 

출처 : 백단향의 정원  |  글쓴이 : 백단향 원글보기

[中國探究] < 34 > '독창적 짝퉁' 만들어내는 현대판 '수호지의 영웅들'

[프레시안 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 교수]
지금 중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산자이(山寨)'다. 작년 12월 3일 중국 국영 CCTV가 2분간에 걸쳐 '산자이 문화'를 소개하면서 그 이름이 공식화되었으며 중국인들은 2008년을 '산자이의 해'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핫이슈가 되었다.

그렇다면 '산자이 문화'란 무엇인가? 산자이 문화의 출발은 중국 남부 광뚱(廣東) 지방의 '해적판 핸드폰' 제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행위를 마치 < 수호지 > 에 등장하는 산적패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산촌에 세워놓은 '산채(山寨)'에 비유하면서 이들 '산채'가 마치 독립적이고 폐쇄적이며 세상과 격리되어 있음을 상징하듯 '산자이'도 이른바 '주류'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풀뿌리' 문화와 같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선이 4개인 '아디도스'


중국에서 이른바 '산자이 문화'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산자이 현상'은 존재해왔다. 즉 해적판, 짝퉁, 표절 등의 행위가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산자이 현상'은 모방, 희화, 풍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산자이 아디다스'는 선이 3개가 아니라 4개가 되듯이, '산자이 콜라', '산자이 mp3' 등 종류와 내용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산자이 문화'의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산자이 현상'이 '문화현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인들의 모호한 문화 융합 현상이 나타난다.

2003년을 기점으로 당시 중국 남부의 광저우(廣州), 선쩐(深圳) 등지의 작은 공방들이 전자제품의 복제품 생산을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외국 유명메이커 핸드폰의 외관 복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러한 복제품들은 IT기술의 발전에 비례하여 원 제품에 새로운 기능을 첨가하면서 '복제'와는 구별된 '복제+창조'의 새로운 형태의 전자제품들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러한 '산자이 현상'이 확산되자 이른바 '정품(주류문화)'에 대한 '산자이(풀뿌리문화)'의 '창신' 능력을 강조하면서 '산자이현상'이 '산자이문화'로 새롭게 진화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마침내 2008년 말부터 '산자이 문화', '산자이 기계', '산자이 공장', '산자이 유명스타'처럼 '산자이'가 홍수를 이루면서 고조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의 복제능력처럼 '주류문화'에 대한 변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지럽게 핀 꽃이 점차로 사람들의 눈을 미혹시키는(亂花漸欲迷人眼)'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한 예로 2007년 '산자이 핸드폰' 판매 댓수는 1억 5천만대로 전체 중국 핸드폰 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산자이 현상은 시장경제에서는 필연적이다. '산자이'의 진화는 초기의 '현상'에서 '산업'으로 변하였고, '산업'이 다시 '문화'로 진화되는 중국만의 현상으로 정착되었다.



▲ 중국에서 유통되는 '짝퉁' 휴대전화들


그렇다면 '산자이 문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복제품'이나 '해적판' 등을 통해 주류문화를 풍자하는 대중의 새로운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산자이 문화'의 본질을 '모방성, 신속성, 대중화'로 규정한다. 이들은 철저하게 전통산업을 파괴하고 '산자이 문화'를 기초로 하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산자이 문화'는 일종의 '하위문화'이자 '부차적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화 다양성'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반문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류문화'를 보완하는 형식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주류'에 대한 '풍자'가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문화로 발전했다고 해석을 내 놓기도 한다. 소자본 계층에 의해 생산되며 빈곤층에 의해 소비되는 새로운 문화가 바로 '산자이 문화'다.

사실 '산자이 현상'이 '산자이 문화'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방송매체가 제공하였다. 중국 중앙방송이 작년 '춘지에(春節)'때 방영한 '춘지에 완후이(春節晩會)'을 모방한 '산자이 춘완(山寨春晩)'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부터 '산자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작년 한 해 중국의 인터넷을 달구었던 '산자이 춘완'에 대한 관심 고조는 '주류' 프로그램의 '매년 그렇고 그런 프로그램'에 대한 소비자들의 식상 때문이었다. 베이징 근교 스징산(石景山)에 '산자이 디즈니랜드'가 버젓이 정식 영업을 하고 있으며 '산자이 류더화(山寨劉德華)', '산자이주제룬(山寨周杰倫)' '산자이 학교' 등등 계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제 '산자이 현상'은 산업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금년 3월 정치협상회의 11기 2차 회의에서 정협 위원인 전 중국 중앙방송 아나운서이자 배우인 니핑(倪平)은 중국 정부가 법률과 행정 규제를 통해 '산자이 현상'을 강력한 단속할 것을 촉구하였다. 청소년과 국가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묵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편 '산자이 현상'을 다양한 문화의 한 형태로 중국의 특수한 표현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인사들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출판을 총괄하고 있는 류빈(劉斌) 중국신문출판총서서장은 '산자이 문화'가 대중들의 창조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한편 '산자이 현상'을 '짝퉁', 혹은 '해적판'의 의미를 넘어 '주류문화'와 '풀뿌리문화'의 대결형태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산자이 문화'가 이처럼 범람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취약한 법률의식의 전통과 관계가 있다. 중국인들의 속담에 '빨간불이라도 손잡고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불법이라도 대중이 함께 하면 괜찮다는 논리다. 더욱이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후진국이 선진국의 문화를 '베끼는' 일이 '병가의 상사'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베꼈고, 영국은 네덜란드를 베꼈으며, 미국이 영국을 베꼈고, 일본은 미국을 베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선진국도 모두 이러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중국의 '베끼기'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논리다.

둘째, '포용성'과 '다양성'을 용인하는 문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중국 문화에는 저변에 '포용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흐름이 있다.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문화전통과 13억 인구와 56개 민족, 968만 평방킬로미터라는 방대한 지역, 중국인들에게 '단일성'은 오히려 어색하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산자이현상'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산자이 문화'를 "민간 문화의 하나이며 다만 과거와 다른 특징은 새로운 전파수단과 새로운 매체의 형식을 빌어 전파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개혁 개방정책 실시이후 지역과 계층 간의 빈부차이에 대한 '위안'과 무관하지 않다. 산자이제품은 소득이 낮아 중저가의 제품을 선호하는 광범한 대중들의 소비패턴과 연관돼 있다. 예를 들면 5,000위엔이 넘는 정품을 산자이 제품일 경우 500위엔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 저소득층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개혁개방의 수혜자인 '주류' 사회에 대한 '풀뿌리'들의 대체 만족감은 정치안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2008년부터 시작된 '산자이 문화'는 새로운 문화 조류로 민중들의 보편적인 심리상태 즉 반 주류, 반 이데올로기, 반 엘리트주의라는 풀뿌리 의식과도 관계가 깊다. 말하자면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대로 입장과 관점 및 생활방식이 있기 때문에 정부나 권위 같은 것은 필요 없으며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의식이다. 이 역시 개혁개방 30년이 가져온 필연적인 사상 해방 결과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산자이 문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산자이 문화'는 실제로 '외국 제품' 보다는 오히려 중국 국내 업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 따라서 '산자이 문화'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원칙'과 '한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산자이 문화'는 '주류문화'가 아닌 하위문화이자 부차적 문화임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한다. '산자이 문화'는 표면적으로 사회현상이지만 그 형성과 발전에는 필연성과 합리성, 그리고 긍정적인 의미가 있어야 한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주류문화에 진입하지 못한 문예작품, 문예형식들이 민간의 문화유산으로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른바 '산채'로 물러나서 소위 '포위망을 뚫고서' 주류문화를 모방을 통해 이를 이용하고 전복시켜야만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온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부차적 문화의 발양에서 분명한 것은 주류문화의 원형이 없이 발전과 붐이 조성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중국의 유명한 화가였던 치바이스(齊白石)의 말이 생각난다. "나를 배우는 자는 살아남지만 나를 베끼는 자는 죽는다(學我者生, 似我者死)"라는 경구를 중국인들은 잊지 말기 바란다.

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 교수 ( inkyu@pressian.com )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오늘 아내의 유혹 마지막에 나온 노래.
어렴풋이 기억난다



멀어져 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린 어떻게 잊을까

아 - 다시 올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수 없어.
아 -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출처:http://blog.naver.com/minj1335?Redirect=Log&logNo=130014247060


[한겨레] [아시아 네트워크/ 아시아의 애국주의- 타이] 캄보디아·라오스·버마 끝없이 깎아내리는 역사 교과서 기술

아누웡왕 평가 둘러싸고 서로간의 불신 극에 달해
▣ 방콕=나빠 홍똥(Pennapa Hongtong)/ <네이션> 기자 “시 아라이 콘 타이 끄리에드 티 숫?” 이것은 타이 수수께끼로 “타이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깔이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해답은 시 댕(붉은색)도, 시 키에우(녹색)도, 시 담(검정색)도 아닌 시 아누크(Sihanouk)다.

캄보디아의 증오, 타이 대사관에서 불타다

타이와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의 전 국왕 시아누크가 들어간 이런 시시껄렁한 수수께끼를 나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풀면서 자랐다.


이런 우스개들은 크메르(캄보디아)를 ‘믿을 수 없는 이웃’으로 여기는 타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이런 경향성은 타이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반드시 배우고 넘어가야 하는 나레수안(Naresuan)왕이 남긴 유산이다.

16세기 아유타야 왕국(타이)이 버마로부터 침공당해 혼란한 틈을 타 크메르 사타(Satha)왕이 쳐들어왔는데, 그 복수로 나레수안왕은 크메르 수도 로웩을 공격하고 라웨악(Laweak)왕을 참수해 왕의 피로 발을 씻었다고 한다. 저명한 타이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꿀(Thongchai Winichakul)은 이런 역사가 “이웃을 헐뜯는 타이식 환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캄보디아쪽에서는 “라웨악왕은 피신한 뒤 탱이라는 곳에서 사망했다”고만 암시할 뿐, 창피스런 왕을 역사 속에 등장시키지도 않았다.

타이 현대사로 넘어와서 가장 도발적인 대캄보디아 ‘저격’은 콤(Khom)과 크메르(Khmer)에 대한 구분인 듯싶다. 타이 버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세계적인 유적 앙코르와트는 타이에 제거당한 문명인 콤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식이다. 콤이 타이에 제압당했다는 ‘설’은 프레아 비헤아르(Phreah Vihear) 유적지를 놓고 두 나라가 소유권 분쟁을 벌이면서 타이 언론들이 대량 살포했다. 그러면서 크메르란 오늘날 캄보디아에 살고 있는 비문명인들을 일컫는 말쯤으로 여겨왔다. 통차이 교수는 콤과 크메르를 구분한 건 “타이 엘리트들이 힌두-부디스트 또는 크메르-산스크리트 가치와 이상(윤회)을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가엾은 이웃에게 제국의 거만함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창안한 ‘작품’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에서는 콤이란 말을 고대 타이와 라오스 사람들이 크메르인을 부른 호칭으로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을 놓고, 타이 사람들이 콤 문명을 찬양하는 한편 크메르를 괄시하는 건 역사의 빈정댐이다. 그러다 국제사법재판소가 프레아 비헤아르(타이쪽에서는 프레아 위헤안으로 부름)를 캄보디아 소유로 판정한 뒤,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 ‘증오’는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여걸’ 타오 수라나리를 아십니까

2003년 1월29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불길에 휩싸인 타이 대사관은 그동안 캄보디아 사람들의 가슴에 맺혔던 타이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준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그 폭동은 캄보디아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한 타이 여배우가 “앙코르와트를 타이에 넘겨줄 때까지는 절대로 캄보디아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떠벌였다”는 소문에서 비롯됐다. 그러자 놀란 여배우가 “죽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는데, 이후 그 폭동이 일어나기 2년 전쯤 그가 한 방송 드라마에서 그런 대사를 읊었던 게 와전된 것으로 드러났다.


19세기 타이 국민 형성 연구에 정통한 통차이 교수는 “이런 일들은 근대에 들어 타이가 과도한 민족주의를 내걸고 국민들에게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믿을 수 없는 이웃’으로, 라오스를 ‘불쌍한 형제’로, 그리고 버마를 ‘못된 적’으로 여기도록 만들면서부터 이미 예견됐다”고 진단했다.

이번엔 라오스쪽으로 넘어가보자. 역사적으로 타이 사람들은 라오스를 ‘농 라오스’(동생 라오스)라 불러왔는데, 이는 라오스를 시암(타이의 옛 이름)의 은혜를 입은 신하쯤으로 여기면서 비롯된 정서다. 물론 이는 라오스쪽에서 보면 당치도 않는 말이 된다. “시암은 라오스 사람들을 노예로 여겨 신분을 구분하고자 문신을 새긴 가혹한 박해자다.” 두 나라 사이의 논쟁과 충돌은 비엔티안의 아누웡(Anouwong)왕이 주제로 떠오르면 극에 달한다. 타이판 역사는 이렇다. “1779년 시암이 라오스를 공격했을 때 비엔티안 마지막 왕의 아들이었던 아누웡을 전쟁포로로 잡아왔다. 이어 1804년 아누웡은 방콕 법정에서 시암의 속국인 라오스를 통치할 왕으로 지명됐다. 아누웡은 시암에 충성을 다하지만 전쟁에서 잡혀온 라오스 사람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요구를 라마 3세(Rama III)가 거부하자 변하게 된다. 아누웡은 자신의 요구를 묵살당하자 1826년 라오스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던 타이 북서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그 뒤 베트남으로 도망친 아누웡을 1829년 타이군이 방콕으로 압송해와 처형한다.” 이 역사 이야기에서 타이 학생들은 또 하나 거대한 ‘여걸’을 알게 된다. 이름하여 타오 수라나리(Tao Suranaree). 1820년대 코랏 부지사의 부인이었던 그는 수많은 여성들을 동원해 반란자인 라오스 군인들에게 술을 진탕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그 틈을 타 잽싸게 공격해 반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다.

자, 이와 같은 이야기가 메콩강을 끼고 살아온 라오스 역사에서는 어떻게 기술돼 있을까? 타이가 기술한 아누웡왕에 대한 역사와 정반대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타이 역사가 아누웡왕에게 시암의 인자함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역자’ 꼬리표를 달았다면, 라오스 역사는 그이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민족영웅’으로 모셔왔다.

그러니 아누웡왕의 행위가 타이에서는 ‘반란’으로, 라오스에서는 ‘독립전쟁’으로 엄청난 개념 차이를 보일 수밖에. 물론 여걸 타오 수라나리 이야기는 라오스 역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한편을 놓고 전쟁 직전까지 가 두 나라는 아누웡왕 이야기를 현실 속에서 민족주의 광고용으로 활용해왔다. 라오스는 1984년 타이와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재깍 아누웡왕 전기를 출판해 국민에게 읽히며 젊은이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했다. 타이는 이에 맞서 1년 뒤인 1985년 라오스가 혁명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자 그들의 코앞인 메콩강가에서 여걸 수라나리를 추모하는 대형 행사를 열어 불타는 민족주의 근성을 드러냈다.

2001년 타이가 이 여걸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발표해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만약 그 필름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우린 확실하게 반격할 것이다.” 히엠 폼마찬(Hiem Phommachanh) 방콕 주재 라오스 대사는 일전 불사를 다짐했다.

영화 한편을 놓고 이웃 나라끼리 만들 수 있는 풍경치고는 지나치지 않는가? 그러나 이는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제 <한겨레21> 독자들은 타이에서 누가 왜 그렇게 가장 싫어하는 ‘시’(색깔)들을 만들어냈고, 또 그 ‘시’들이 어떻게 쓰여왔는지를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타이 사람들은 아직도 그 ‘시’를 추종하고 있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rok khme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8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