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인도 여행에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한게 정말 아쉽다.
지금 보면 남는건 사진뿐이라지만
내 가슴속에 남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언제라도 금세 기억 날 수 있도록
사진을 많이 남겨놓았으면 좋았을 걸....은
여러가지 많은 일들 해프닝에 카메라 들 생각을 겨를도 없었던 그 당시의 나에겐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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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카레냄새.
각 나라마다 고유의 냄새가 있다고 하는데(우리나라는 공항부터 마늘 냄새가 난다고 누가 그랬는데..)
인도는 역시나 강한 카레냄새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레+코리엔더+샌달우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화물찾는곳에서 땅에 털퍼덕 앉은 한 여인이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인도를 갔다 온, 오랜시간의 여행자들이 다들 그렇듯, 그녀도 경계없는, 약간 풀린 커다랗게 뜬 따뜻한 눈길을 가지고 있다.
눈빛을 읽고 나도 미소로 회답해 주었다.
나오자마자 우린 덩그러니 차가운 느낌의 공항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가르쳐주는 총든 군인들의 지시하에 바로앞에 있었던 ATM을 찾아 왔다갔다 거렸다. 7년전에 인도에 와봤다던 유스케는 많이 바뀌었다며 놀라워했고, 나의 상상과는 달리 (공항 안의 여러가지 손모양의 조각들이 있었는데 그것 빼고) 너무 현대적이고 사람들만 빼면 인도란 느낌이 없는 공항에 약간 실망을 했던것 같다. (난, 조각된 대리석, 향 등등의 타지마할 같은 공항을 상상했었다)
준비성없기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점은 똑닮은 우리 둘은 돈 개념을 몰라 우선 500루피만 뽑기로 하고, 마침 아까 눈인사를 한 그녀와 택시쉐어로 메인바자까지 가기로 했다.(택시한대에 330루피. 정부에서 한다는거길래 탔더니만 나중에 보니 정부가 돈버는거였음. 나중에 올 때는 메인바자에서 공항까지 230에 감)
그렇게 택시(라기보단 작은 봉고+툭툭의 하이브리드 같았지만)을 타고 도로를 달리는중에 아까 그녀의 론리 플래닛을 빌려봤다. 음. 100루피에 2.5달러. 이정도면 나쁘지 않네.
솔찍히 메인바자 도착전까지. 살짝 실망스러웠다. 도로가 마치 우리나라 인천공항 도로같이 잘 닦여 있어서, 그냥 여기도 어디나 있는 그런 도시일까봐.
하지만 메인바자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이런 걱정은 길을 막고 있는 소떼, 혹은 칭칭거리는 릭샤에게 비키라는 차들의 빵빵소리와함께 짜릿하게 부서져 버렸다.
메인바자.
택시기사와 연줄이 있는지 그는 우리셋다 몽땅 하레 크리쉬나라는 '론리플래닛 추천'한 게스트하우스 앞에 내려주고
유스케나 덧치녀완 달리 인도가 처음인 나는, 신나기도, 여기저기 나는 소리들에 정신없기도 해서 그냥 그들을 줄줄이 따라갔다.
400루피.
그녀는 이 가격에 항복했고 자랑스런 유스케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다가 결국 그들이 제시한 마지막 가격 300루피보다 훨씬 싼 200루피에 다른곳을 가게 되었다.
우릴 안내한 삐끼소년은 네팔에서 건너온 18살(이라곤하지만 뻥인것 같음. 많이봐도 한 15살 됐을까)짜리 아이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꼬마들이 싸우면 중재해주고 애들이 반가워서 따라오면 미소로 다 받아주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샨티샨티한 아이였다.
핫샤워를 하려면 엑스트라챠지가 붙는다는것 빼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방.
짐을 풀고 나와 밤거리를 걸어다녔다.
아까완 달리 무서움.
비가오고 난 뒤라 그런지 땅은 군데군데 진흙탕에, 콘크리트, 철근이 다 드러난 반은 부숴놓은 건물들, 바빡 마른소들과 사람들 눈치보는 떠돌이 개들, 무엇보다 대놓고 손가락질하거나 우릴보고 웃고 장난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도 아니면서 아이들같은 어른들.
유스케가 같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그렇게 한 5분을 걸었나, 
무서움이 가시더니 이젠 막 이해할수없게도 머리위에서 바람이 새는 느낌과 함께 이상한 감동이 마음속에서 스물스물 나오기시작하더니 눈물이나기 시작했다.
괜히 나의 상황이 이들보다 낫다는 자만감에서 나 온 측은지심,이렇게 살면서도 밝게 사는 그들의 사랑스러움, 이들을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다는, 허세투성이 여행자의 마음? 이런것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어떻게 보면,지금생각해보면, 거짓눈물.(왜냐면 난 내 이익이 걸린 문제에선 다른사람은 뒷전인 역시나 하나의 이기적인 인간인걸 알기에).
하지만 그때 어둡고 축축한 밤길을 걸으면서 느낀 감정 변화의 종착부분은 (신남->복잡함->무서움->감동->행복) 지금 생각해도 무언가 특별했던것 같다.

잠시 산책 후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한번 유스케에게 너무 고마웠다. 보호받는 느낌이야말로 두려움에서 가장 빨리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감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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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어나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어제본 풍경엔 빛이 더해져 어젯밤 나에게 찾아왔던 두려움을 모두 쫒아내 주었다.
기차역에가서 리쉬케시로 가는 기차표도 사고(어디서나 인도 공관의 특징:펜 빌려주는걸 자원낭비로 생각하는것 같다. 옆에 있던 여행자에게 빌려 씀. 그리고 표 프린트 해주는 아저씨의 아버지같은 미소. 눈빛.)표사고 나서 역안의 카페테리아에서 20루피도 안하는 탈리와 차이를 맛보고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포장지로만든 종이그릇에 넣어주는 빠니푸리도 사먹었다.
 돌아다니다 이사람들이 얼마나 사기를치나 보려고 기차역 근처의 여행사에 가서 리쉬케쉬가는 기차표를 물어보니, 지금 리쉬케쉬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로 기차가 끊겼다고 한다.(응?) 다른곳도 같은답변. 표를 파는 곳에선 우리가 산 가격의 배는 불러서 기분 좋았지만, 몇 여행사의 홍수 이야기에 걱정이 좀 되기도 하고.
아무튼 뉴델리에 있는동안 비와 진흙(+소똥)에 안되겠다 싶어 비장화를 사려고 컨넛 플레이스까지 뒤졌으나 결국 찾기 어려움(아,,, 난 뉴델리에 다시오면 비장화장사를 하겠어요)
아, 컨넛 플레이스에서,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 한 거지가 발가벗고 신문지로 중요부분(=얼굴)만 가린채 대자로 누워있었다. 우린 그 사람이 죽었나 해서 걱정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맞은편의 한 인도인이 그 기다란 손가락을 펴고 우리에게 한마디 하고 가버린다.
"this is our india."




메인바자 거리에서 빠니푸리를 먹다. 비가오면 몇몇인도인들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뒤집어쓴다. 머리통 작아서 좋겠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소그 골목 구석구석을 걷다보면 이런 멋진곳도 종종 있다.

나중에 우리의 단골이 된 한 차이 집. 영어와 힌두어를 같이 써 좋아서 믿을만하다. 차이 5루피

한 어린 학생이 차이를 끓여주는데 할아버지들이 오셨다. 맨 오른쪽 손님 할아버지는 귀도 잘 안들리시고 풍이 왔는지 천천히 움직이시는데 학생이 참 친절하게 큰 소리로 말도 걸어주고,,참 흐뭇했음.

라시 말고 따뜻한 우유. 비와서 살짝 쌀쌀할 땐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 이 풍경이었던 것 같다. 사진은 다음날 길가다 발견한 바짝 마른 하얀 소

소들이 어디서 잘까 궁금해서 한번 따라가 봤다.

소의 집. 쓰레기장! 푹신한 쓰레기들 위에 산책하고 돌아온 소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낮의 메인바자. 이땐 비와서 진흙투성이.

개들도 여기저기





짜증도 많이내고, 울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던 마야마살라.
급하게 떠나느라 아쉬운점이 많다.
윗층 짐방 사진들을 마지막으로 찍어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은근히 멋있었던 아비쉑도('저 손님이 행패부리는건 저 사람 잘못이 아니야,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해')
나중에 다른곳 갔다온 잘생긴 바이가이도(미안, 이름을 까먹었네, 저번엔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랬어. 지금은 대환영인데 한국엔 안오니?ㅠㅠ) 
나중에 늙어보인다고 콧수염을 밀어버린, 내가 등이 아프다고 하자 땅의 기운을 받는 수면법을 알려준 쉐프도
너무 귀여운 아들을 두고 온 회계학도 라만도(라만, 진짜 니가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온, 잘생겼다고 사진상으로 한국 여자들에게 인기 많았던 그도 (미안, 이름을 또 까먹었네. 너무 인기가 많아서 살짝 나 하나쯤은 관심 없어도 되겠지 이랬으나, 진짜 너 성실한건 인정해. 멋있는 남자!)
혜성같이 나타나 오전일을 다 잡아버린, 정말 발랄한 기운이 넘쳐나는 그녀도(미안, 내가 이름 외우는데, 특히 긴 이름들은 외우기 어려워서 ㅠ)
다들 너무 그립다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쿨윈더. 처음엔 사장 가족이라 그런지 이것저것 시켜서 엄청 짜증났지만, 내가 말을 여러범 씹은후로(?) 자기네 집 소 사진 자랑도 하고, 푼자비 옷도 빌려주겠다고 해서 친해졌다.

언제나 몰래 새우튀김이나 닭튀김을 건내던 장난꾸러기. 윌리가 미키마우스라고 부르면 신경질내고 ㅋㅋ

윌리, 마음넓고 책임감 강한 지배인.어딘가 우리 할아버지 닮았다. 스리랑카 출신이라 힌두어도 잘 못알아 듣지만 영어만으로 인도인들 직원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음. 왠만하면 높은 직급일수록 비판적이게 보게 되는 나인데도, 가끔 존경스러웠다.


로빈이 누나몰래 집에 초대했다.
귀여운 어린 아들
낯가리는기색도 전혀 없이
귀염둥이 장난꾸러기다. 로빈은 늦게 본 이 아들이 얼마나 예쁠까?

미얀마에서도 우리나라랑 비슷하게, 다른인종과의 결혼은 쉽지 않은가 보다
로빈이 결혼할 당시 인도혈통인 로빈쪽 가족에선 미얀마 인과 결혼하는걸, 미얀마혈통 부인쪽 가족에선 인도인과 결혼하는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누나쪽이랑도 사이가 많이 좋지 않은거라고
하지만 인종의벽도, 나이의 벽도 허물어 둘은 이렇게 예쁜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 호주인여행객 부부가 이 아이 학비를 스폰서 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고마움에 아이 사진을 찍어서 호주가는길에 부쳐달라고 부탁했는데
한국에와서야 부치게 된다.(유스케 호주가면 부탁할까-_-?)

정작 자신은 가난하다고 부끄러워했지만, 내가 보기엔 깔끔하고 무엇보다 뒷마당이 산꼭대기라 크지는 않지만 산 전경이 뒷마당에서 다 내려다 보인다.
어떤 한 이웃은 여기 이런 지형이 악마의 지형이라, 넌 악마의 집에서 사는거라고도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건 분명히 샘이 나서 그런게 확실하다...고 말해줬다.
배불러 죽겠는데, 미얀마+인도식으로 계속 밥을 먹여대서(볶은 버섯같은 음식은 참 맜있었다)
오는길에 크지도 않은 마을을 빙 돌아 간 기억이 난다.
소화시키려고..

엄마와 함께. 엄마랑 많이 닮았다

엄마는 다른 미얀마 여인들처럼 다나까를 바르고 계신다.

내가 고양이 너무 귀엽다고 하니까 계속 안고 사진찍어달라고 한다

나중엔 장난으로 고양이 꼬리를 물어서 고양이가 도망갔음,

로빈네 가족은 2차대전 때 미얀마로 넘어왔다고 한다. 맨 오른쪽 아래가 군인시절당시 로빈의 아버지. 왼쪽 컬러사진이 로빈의 전 가족.

도망다니는 고양이를 다시 잡고, 뒷마당이 보이는 부엌 창가에서.

로빈과 아들. 그리고 뒷마당. 로빈은 자신이 가난하다고 했지만 뒷마당만 봐선 그 어느 부자 부럽지 않다.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들.



2011→ Argentina!!!


Rainbow Gatherings are temporary intentional communities, typically held in outdoor settings, and espousing and practicing ideals of peace, love, harmony, freedom and community, as a consciously expressed alternative to mainstream popular culture, consumerism, capitalism and mass media.

Rainbow Gatherings and the Rainbow Family of Living Light (usually abbreviated to "Rainbow Family") are an expression of a Utopian impulse, combined with bohemianism, freethought and hippie culture, with roots clearly traceable to the 1960s counterculture. Mainstream society is viewed as "Babylon," connoting the participants' widely held belief that modern lifestyles and systems of government are unhealthy and out of harmony with the natural systems of planet Earth. The original Rainbow Gathering was in 1972, and has been held annually in the United States from July 1 through 7 every year on National Forest land. Other regional and national gatherings are held throughout the year, in the United States and throughout the rest of the worl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ttp://en.wikipedia.org/wiki/Rainbow_Gathering#World_Gatherings


중국학교에서 친해진 태국 친구.꽁.
같이 천진에 놀러갔다 어머니께서 차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 엉엉 울어서 꼭 안아줬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태국에서 본 꽁은
어머니를 잊은 슬픔이 서서히 가셔가는 듯, 다행이다.
이번에 어머니 제사같은 의식을 집에서 한다고 하길래
꽁네 집에 몇일 묵었다.

친척중 한분이 이번엔 과일이 너무 풍년이라 팔아도 제값을 못받아서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있어도 따질 않는다며
매일 신선한 과일을 가져다 주었다.
그중에서 짬빠, 그러니까 jack fruit. 진짜 꿀맛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게 너무 너무 맛있어서
저녁먹기전에 배터지게 먹어댔다.
그렇게 단 과일만 먹다보니 왜 태국음식이 매운지 알것 같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동치미 국물이나 김치를 먹는것처럼
달고 단 과일들의 그 단 맛에 지루해질 때 쯤 개운하게 확 뚫어준다고나 할까?

꽁의 집
주변에 검은 모래 해변도 있고(썬탠한다고 누워있다 바람에 분 모래땜에 몸 전체가 다 연탄색이 되어버렸다)
이발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작은 구멍가게도 겸비하셔서
두리안 맛 아이스크림 등을 시도때도 없이 꺼내다 주시고
앞의 작은 탁자엔 아저씨 친구분들이 가끔 와서 담소를 나누시고
또 밤에는 미얀마에서 불법으로 건너온 일꾼들이 모여서 기타 두대로 합주하며 부르는 노랫소리.
조용한 밤 시골길을 오토바이타고 달리면 부는 바람, 반딧불 (힝 호이, 힝호이~)
그리고 두루두루 친척, 이웃집을 들를때마나 너무도 반겨주시던 사람들,
처음에 꽁이 우리집 가난해서 시설(?)이 별로 안좋다며 당부(?)를 할 때마다
뭐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겠지, 생각했다가
지붕에 뚫은 구멍으로 모은 빗물(태국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방이라고 한다)을 담은 욕조로 샤워할 땐, 벽지도, 바닥도 모두 시멘트에 개미들과 함께 부엌을 공유했을 땐 조금 놀랍기도 했지만,
친절한 사람들의 미소, 열심히 일한 일꾼들의 노랫소리,
무엇보다도 날 가족처럼 너무 잘 대해준 꽁과 아버지, 귀여운 동생 준 덕분에
태국여행에서 가장 좋았던곳이다.
라농.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

짬빠. 내가 먹어본 최고의 꿀맛과일. 나중에 말레이시아에서 먹었는데 이때만큼 맛있지 않았다.

꽁 아버지는 이발을 하시고 바로 앞 테이블엔 동네분들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꽁의 아버지, 젊었을 때 외모에 관심이 많은 멋쟁이셨다고 한다. 지금은 남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발일을 하신다

이발소 옆에 작은 구멍가게도 하신다. 동네분들, 친척분들 앉아서 같이 한컷. 밤엔 앞 고무나무밭에서 일을 마친 미얀마 불법노동자들이 여기 앉아 술한잔씩하며 기타와 노래를 한다.

태국의 집 앞에는 작은 집들이 있다. 집을 보호해주는 신들이 사는 집이라고 한다. 보통 우리나라돈으로 10만원도 넘는 신의집을, 꽁의 아버진 직접 만드셨다. 이렇게~

뒷마당에서일하는 꽁

우물. 비가 적게오거나 하면 여기서 물을 끌어다 쓴다

어머니 제사 준비 도와드렸다, 먹물을 빼는작업이었는데 중간에 사진. 사진만찍어대고 도와준건 사실 별로 없어서 미안하네..

아까 그 우물에서 물을 끌어다 주었다.전통방식으론 태국에선 여자들이 조숙하게(?) 이런 천을 몸에 두르고 샤워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욕조 위로는 구멍뚫린 지붕. 빗물을 모아서 쓴다. 아, 이때 참 썬탠 잘됬었는데 ㅠㅠ

귀여운 꽁, 그리고 두리안 아이스크림

아저씨의 작업장과 각종 사진들

역시 이가족도 태국인! 국왕의 사진이 걸려있다

까만모래 해변. 이 때 바람불어서 온몸이 저 모래색이 됬었음, 나중에 비와서 다 씼어지긴 했지만..


날 태워주느라 고생한 꽁

친척중 한 아이, 굉장히 애교많고 장난꾸러기였다

어머니 제삿날, 스님이 오셔서 모인 가족들에게 (축복(?)의 의미로)물을 뿌려주고 계시다

의식이 끝나자 돌아가시는 스님들. 차에 타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무나무 밭

이런식으로 비스듬하게 나무껍질을 잘라 고무를 채집한다. 비가오면 망치는데 이곳은 비가 많이 와서 그다지 좋은 수입은 아니라고







메인 바자에 전날 도착했을 땐
무섭고 사랑스럽고 감동스럼고
만감이 교차해서 울었는데
다음날 비개인 거리를 보니
다시 현실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빠니푸리를 파는곳에 있던 우리나라 축구 응원복 입은 아저씨. 네! 아저씨 찍는거 맞아요!


 유스케가 도착하고
이제 드디어 여길 떠나게 되었다
이제 떠난다는 마음에 즐겁기도 했으나
그동안 정든 한국사람들, 통가 사람들
두고오기 살짝 아쉬웠다.
마지막 사진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노바디 노바디 볏 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처준

게이들은 사회적 소수자라 그런지
참 이해심이 넓은것 같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자아가 있기마련인데
누가 공격하거나 해도
그냥 그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그들의 생각은 흘러가는것 같다.
어쩌면 인도에서 배운 그 '자아버리기'를 다른 우리보다 쉽게 해낼것

나는 이해심많고 세심한 게이들이 참 좋다.

여자가 가져야 할 머스트 해브 친구  

 


같이 가라지를 쓰던 동생중에 포토샵에 능하고 각종 장비를 구비한 한 동생이
사진을 찍어준다고 했다.
알렉시스가 남기고 간 튜브 드레스를 입고
가슴에 왕창 뽕을 넣고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포토샵에 능한 동생이 포토샵해준 사진



가라지 같이쓰던 동생들.
막내왜 동갑이어서 그런지 귀엽고 정이 갔다.
아직도 랩탑을 쪼르륵 엎드려서 눈물콧물 다 흘리며 본 하모니와
계속 틀어놨던 한국 랩들이 아른아른하다.
에메랄드 집에서 나오려면 클리프를 꼬셔야한다.
그리면 우린 콜스나 피씨방의 향락을 누릴 수 있다.
가끔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이 떨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