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
'한 나무에 한 둥지만 틀면 새는 별 탈 없이 살지만,
한 나무에 여러 둥지를 틀면 새는 (결국) 굶어죽는다.'


'사람은 아이를 (끊임없이) 낳을 수 있지만,
(먹고 살아갈) 땅과 자원은 다시 낳아 만들 수 없네.'


'자식을 많이 낳는 집에는 농사지을 땅을 주지 말고,
자식을 많이 낳는 집의 딸은 며느리로 들이지 말라.'
- 무분별한 인구증가를 경고하는 잔리촌 동족대가 중에서
한 마을이 있다. 오지의 깊은 산골에서 1000여 년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소수민족 동족(?族) 집단거주지. 오랜 세월에 걸쳐 과학적으로 풀기 힘든 약초와 조화로운 자연환경 속에 인구 증가를 철저히 억제한 신비의 마을.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진 구두(口頭)의 마을 규약을 조상 대대로 지켜온 주민들. 중국정부의 행정조사 이래 형사범죄 발생률 0%인 평화롭고 따뜻한 마을. 세계 최초·최고의 인구계획 촌락 잔리(동족어, 한자 표기는 '占里')다. 신비의 마을 잔리촌, 그 곳에 가다 중국 구이저우성 구이양에서 9시간을 달려서 닿은 총장 현청에서 다시 1시간 동안 험난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잔리촌. 1949년 공산 중국 건국 후 오늘날까지 잔리촌은 150~160여 가구 700여명의 인구를 유지해왔다. 1952년 중국 최초의 전국인구조사에서 잔리촌은 가구 168호, 주민 729명이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가구 154호, 주민 739명으로, 가구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중국정부는 1979년부터 강력한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농촌 거주의 소수민족은 예외로 두 자녀까지 둘 수 있다. 게다가 개혁개방정책 이전에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마오쩌둥의 그릇된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정부는 적극적인 다산 정책을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1950~70년대 중국은 기록적인 인구증가세를 보였지만, 1970년 잔리촌 주민 수는 729명이었다. 18년 전과 비교할 때, 단 한 명의 주민도 늘어나지 않은 것.





114명 전교생이 나와 함께 아침체조를 하는 잔리초등학교 어린이들. 1980년대에 태어난 잔리촌 아이들의 출생비율은 남녀가 94:9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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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논을 경작하고 아내는 밭을 일군다. 잔리촌에서 남녀평등은 주민의식과 노동, 생활에서 확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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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지화셩위 마을', '중국 인구문화 제1촌', '동족 문화와 풍습의 살아있는 생태박물관'…. 잔리촌은 한 가정에 오직 1남1녀만 낳는 신비로운 비밀을 간직한 마을로 유명하다.
잔리촌의 또 다른 비밀은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을 광란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옛 전통과 문화풍속, 생활방식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점이다. 잔리촌 동족은 홍위병과 지방 관료의 무자비한 파괴와 시퍼런 감시 속에서도 남몰래 1남1녀의 자녀 낳기와 민족문화를 지켜왔다. 그 전통은 21세기 첨단 현대문명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잔리촌은 마을 집회와 의식행사를 여는 회당인 고루(鼓樓)를 중심으로 150여 가구가 사이좋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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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리촌을 가로지르는 개천 옆으로 소를 모는 한 할머니. 갓 수확한 찹쌀은 한 달 동안 햇볕에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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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여 년 동안 한 가정 1남1녀만 낳는 마을
잔리촌은 마을 형성의 역사부터 신비롭다. 우야완(43) 잔리촌장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최초로 잔리에 뿌리를 내린 일족은 1000여 년 전 전란과 기아를 피해 광시 장족자치구 우저우에서 강을 따라 총장현에 이르렀다. 이주민이었던 선조들은 원주민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풍수가 좋고 농사지을 땅이 알맞은 산골 오지인 잔리로 보금자리를 정했다. 대대로 잔리 주민들은 단결심이 강하고 상부상조하면서 화목하게 지내왔다. 최초 5가구에서 시작된 잔리의 역사는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100여 가구로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농사지을 땅을 무차별적으로 개간하고 하나둘 느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빠지게 일해야 하는 상황을 낳았다. 한 집안에 조부모부터 손자손녀까지 3대가 화목하게 살던 잔리의 대가족엔 토지 개간과 부족한 양식 문제 때문에 심각한 분쟁과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300여 년 전 잔리 선조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마을과 촌민의 미래와 생존을 위해 한 부부 간에 오직 두 명의 자녀만 낳도록 한 것. 청나라 초기 잔리촌 최대의 성씨 집단인 우씨 최고어른은 마을 전체회의를 고루(鼓樓)회당에 소집하여 인구계획을 실행하는 마을 규약을 선포했다. 그 자리에서 잔리촌 주민들은 인구계획 규약을 엄숙히 따를 것을 맹세하면서, 위반한 가정은 마을에서 쫓아내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4세기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문서화되지 않은 마을 규약을 그 누구도 어기지 않았다. 류화린(40) 총장현 인구·지화셩위국 주임은 "잔리촌에서는 갓 결혼한 가정을 제외하고 100% 한 가정에 자녀 둘만 두었다"고 소개했다. 놀라운 것은 98%의 가정에서 1남1녀의 자녀를 둔 점이다. 1980년대 태어난 잔리촌 아이들의 출생비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 94명, 여자 93명으로 거의 50대50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잔리촌의 가족 구성원은 자녀가 각각 남자·여자아이 하나씩 있고, 아이의 아버지는 누나나 여동생이 있으며 어머니도 오빠나 남동생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류 주임은 "극소수의 가정에서 남자만 둘, 여자만 둘 낳은 가정이 있긴 하지만 성비율은 1남1녀로 균형을 보인다"면서 "전체 총장현에서 오직 잔리촌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잔리촌에서 환화초를 조제할 수 있는 약제사 우나이카 할머니. 82세의 고령에도 약초를 다듬는 일은 직접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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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를 짧게 잘라 바구니를 손수 만드는 한 중년남자.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형성된 자급자족 경제체제 때문에 잔리촌에서는 누구나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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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영약 '환화초'로 성별을 조절할 수 있을까
1990년대 들어 잔리촌의 놀라운 1남1녀 자녀생육 현상은 중국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국가지화셩위위원회, 중국인구정보센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인민대학 인구연구센터, 구이저우대학 인구연구센터 등 중국 중앙기관과 각지 대학에서 전문가가 파견되어 잔리촌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인류학·민속학·의학·유전자 분야에 걸친 다양한 연구와 조사를 벌였지만, 지금도 그 의문을 속 시원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전문가들이 추측한 1남1녀 비밀의 원인은 대체로 3가지다. 첫째, 종족 보존과 균형적인 1남1녀를 갖기 위한 성별조절약 '환화초'의 복용이다. 잔리촌에서 임신한 여성은 첫 아이의 경우 자연출산을 하지만 둘째는 첫째와 반대로 환화초를 먹어 성별을 조절한다. 환화초는 태아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신비의 영약으로, 중국 내에서 오직 잔리촌에서만 채취하고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잔리촌에는 환화초를 조제하는 약제사가 따로 있는데, 지금은 우나이카(82·여) 한 사람만이 남아있다. 환화초 약제사는 조제 비법을 오직 여성에게만 전수하고, 마을 촌장도 조제실에 들어가거나 조제법을 강제로 알아낼 수 없다. 우나이카는 "환화초는 임신한 지 1~2개월 내에 복용해야 약효가 있다"면서 "3개월이 지나면 약효가 없다"고 밝혔다. 우 약제사는 "환화초는 단 두 종류의 약초"라며 "환화초를 끓인 물을 임산부가 하루 3번씩 1주일 동안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우야완 촌장은 "깊은 산속에서 환화초를 캐오는 사람은 우나이카의 아들이고 조제할 때 돕는 사람은 그의 며느리라 마을 주민 누구도 조제법을 알지 못한다"면서 "약제사는 임산부의 자녀 상황을 듣고 아들이나 딸을 낳아야 할 상황에 맞춰 환화초를 조제해준다"고 말했다. 둘째, 잔리촌 주민들은 피임 효능을 지닌 약초를 복용하여 생식을 막는다. 잔리촌에는 환화초 외에도 아이를 낳게 해주거나 피임을 가능케 해주는 약초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화초와 마찬가지로 잔리 사람들은 신비한 약초의 존재와 제조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셋째, 조혼 풍습이 만연한 다른 소수민족 촌락들과 달리, 잔리촌은 일정한 연령을 넘어야 결혼토록 하고 아이를 늦게 낳는 규율이 엄격히 정해져 있다. 마을규약에 따르면, 남자는 20살이 넘고 여자는 19살이 지나야 결혼을 할 수 있는데 보통 23~24살에야 혼인한다. 또한 잔리촌 주민끼리만 서로 결혼하여 타 촌락민과의 통혼을 철저히 막고 있다. 가족 내의 근친결혼도 엄금하고 있다.




주택 바깥에서 말린 동족 전통의복인 '민감'의 옷감을 거두는 한 여인. 지금도 전통제조방식 그대로 만들어지는 민감은 방수·방풍이 뛰어나고 색감도 아름답
ⓒ 모종혁


다 익은 볍쌀을 거두는 한 부부. 잔리촌에서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작업 파트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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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땅에 깊은 산, 맑은 물까지... 채식 위주로 먹으며 건강생활


그러나 환화초를 비롯한 약초 복용, 만혼만육, 내부통혼 만으로는 잔리촌의 1남1녀 자녀 낳기 신비를 풀 순 없다. 기자를 잔리촌에 태워다준 총장현청 주민은 "환화초가 영험하다고 해서 몇몇 현청 주민과 외지 사람들이 약제를 얻어갔지만 아무런 효능을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양준창 구이저우대학 인구연구센터 부교수도 "환화초의 효능은 '잔리현상'의 여러 요소에서 한 부분일 뿐"이라면서 "잔리촌의 전체적인 자연환경, 주민들의 문화풍속과 생활습관, 내부통혼에 따른 유전자적 변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잔리촌의 자연입지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다. 오지 깊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자락은 외부세력의 침탈을 막고 있고, 마을 좌측에 흐르는 개천은 하루도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기름진 땅에서는 윤기 흐르는 찹쌀과 미곡이 수확되고 산속에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인구조절을 해온 덕택에 잔리의 1인당 토지경작 면적은 1.5묘로 중국 평균 1.4묘보다 높다. 인구계획 규약을 실시한 이래 잔리촌은 일찌감치 배불리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 잔리촌의 식생활은 수백여 년 이래 전승된 전통 동족 음식 제조법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잔리촌 동족은 절대 과식·과음을 하지 않고 채식 위주 식단에 적절한 육식을 섭취한다. 우리의 김치처럼 몇몇 채소는 고추와 소금에 절여 한 달 이상 독에 넣어 발효시킨 뒤 식탁에 올린다. 잔리의 발효 음식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양식한 물고기를 잡아 내장을 발라낸 뒤 갖은 양념을 넣어 찹쌀과 함께 밀봉 상태에서 최소 1년, 최고 수십 년 동안 발효시키는 옌위다. 기자가 현지에서 먹은 닭백숙·닭죽과 발효 무김치는 우리의 그것과 똑같았다. 철저한 남녀평등 풍습... "여자아이 더 좋아한다" 예부터 철저한 남녀평등 사상과 생활풍습을 지닌 점도 주목된다. 잔리촌의 가족사회는 여전히 대가족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 가옥에서 조부모·부모·자녀 등 3대와 고모 혹은 삼촌 가족이 함께 살지만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은 남녀가 분담한다. 농사일도 부부가 함께하고 마을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에도 여성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 우야오페이(吳耀飛·여)는 "집안 어른들은 여자아이를 낳으면 집안에 풍요가 깃드는 징조라며 더욱 좋아하신다"면서 "지금도 잔리 여자들은 타 촌락민과 결혼하면 집안과 바깥 일이 고되고 다산과 양육 부담에 늘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볍쌀을 고르는 여인. 일부 현대문명의 생활이기를 제외하고 잔리에서의 작업 방식은 수백여 년 동안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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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 건조대 밑에 자리 잡은 돼지우리와 그 아래에서 양식되는 물고기. 잔리촌에서는 한 톨의 쌀과 돼지먹이도 낭비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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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구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고르바초프(Gorbachev)가 나온 명품업체 ‘루이뷔통’(Louis Vuitton) 광고 사진이 촬영 4개월 만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진 속 가방에서 삐져 나온 잡지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을 배경으로 고르바초프가 명품 루이뷔통 가방을 옆에 두고 리무진에 탄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에서 가방 지퍼 바깥으로 살짝 보이는 러시아 잡지 제목은 이렇다. ‘리트비넨코 살해 사건: 그들은 7000달러에 살해 용의자를 넘기려고 했다.’

잡지에 나온 알렉산더 리트비넨코(Litvinenko)는 러시아 연방보안국 FSB(구소련 비밀첩보조직 KGB 후신) 전직 요원으로 지난 1998년 러시아 재력가이자 반체제 인사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영국 망명 중)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폭로한 인물이다. 이 사건 뒤 그는 두 번 수감됐다가 풀려나 2000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리트비넨코는 이후 자신처럼 러시아를 비판하다 망명한 친구 안나 폴리트콥스카야(Politkovskaya· 언론인)가 괴한의 총격에 숨지자 이 사건을 추적하던 중 지난해 11월 사망했다. 당시 구소련 정보원들이 사용한 방사능 독극물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영국 정보기관이 러시아 첩보조직의 안드레이 루고보이(Lugovoi)를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지목해 러시아에 송환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Putin) 러시아 대통령은 “암살됐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송환을 거부했다.
고르바초프의 의도된 연출인가?

고르바초프 측은 사진 촬영 당시 잡지의 내용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한다. 고르바초프의 비서인 파벨 팔라츠첸코(Palazhchenko)는 뉴욕타임스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최근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됐고, 당황스러워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르바초프의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광고 촬영 장소로 직접 베를린을 선택했을 만큼 꼼꼼했던 고르바초프가 바로 옆에 러시아 잡지가 있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리트비넨코의 친구이자 암살당한 폴리트콥스카야와 관계가 있었다. 그녀가 일했던 러시아 일간지 ‘노바야 가제타’(‘새 신문’이란 뜻)의 최대주주가 고르바초프다. 사망한 날(10월 7일)이 푸틴 대통령 생일과 일치하는 등 암살 배후로 푸틴 대통령이 지목됐던 가운데 고르바초프는 1000달러 상당의 현상금을 걸고 직접 범인 색출에 나서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의 비서는 “잡지 해프닝과는 별개로, 리트비넨코 사건은 범죄사건으로 분류해 철저히 조사돼야 한다는 게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광고 효과 보려는 루이뷔통과 광고사의 수작?

루이뷔통과 광고 제작사인 ‘오길비 앤 매더’(Ogilvy & Mather)도 펄쩍 뛰었다. 루이뷔통의 피에트로 베카리(Beccari) 마케팅 이사는 “ ‘개인적 여행’이라는 메시지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광고에 부여하지 않았다”며 “만약 의도적이었다면 왜 읽기 힘들게 잡지를 뒤집어 놨겠느냐”고 뉴욕타임스에 되물었다. 광고사의 유럽·중앙아시아·아프리카 지역담당 CEO 다니엘 시코리(Sicouri)는 “사진작가 애니 라이보비츠(Leibovitz)의 소품 담당자가 사진을 돋보이게 하려고 러시아 잡지를 갖다놨을 뿐 거기에 리트비넨코 내용이 있었던 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리서치 회사 ‘브랜드 키즈 (Brand Keys)’의 로버트 파시코프(Passikoff) 사장은 “햄버거 빵 위의 참깨 위치까지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 사진을 찍는 광고산업에서 우연의 일치란 없다”고 못 박았다. 파시코프 사장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루이뷔통과 오길비 회사는 이 광고로 대중적 관심에 논란까지 이끌어 냈다”며 “이는 광고시장에서 성공의 척도”라고 밝혔다. “명백히 의도했던 거라고 인정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순간 광고는 쓸모 없어지는 겁니다.”
[전현석 기자 winw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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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마피아의 대부로 활약해온 살바토레 로 피콜로가 드디어 경찰에 잡혔다.
최근에 시실리섬 팔레르모의 외곽 지역에 있었던 마피아 수뇌부 모임 현장을 급습해서 잡았다고..
이들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현재 마피아 계보에 관한 중요한 서류들도 발견했다고 한다.
지난 24년동안 수배되어온 피콜로가 드디어 잡힘으로서 이탈리아 범죄 조직이 상당한 타격을 받겠지만
오히려 젊은 보스의 시대를 열어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한다.
한편 이들 마피아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내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마피아 조직의 한 해 매출액이 약 900억 유로로 이탈리아 국내 총생산의 7%에 이른다는 것..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업가들이 마피아에 정기적으로 바치는 돈이 매년 300억 유로라고..
우리 나라의 조폭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돼~ㅎㅎ
왜 도데체 불쌍하고 착해보이는거지? 보통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상..
그런 힘으로 보스가 된건가?
“나한테 에이즈 옮은 새 남편 끝까지 나를 탓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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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7월4일은 르완다의 인종청소 종식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날 피해자인 데보라(50·왼쪽 사진)와 가산자이레(40·오른쪽)를 만났다. 이들은 르완다 수도 키갈리 외곽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판자촌에 산다. 아이들은 쓰레기가 뒹구는 미로 같은 골목에서 뛰어놀고, 화장실이 변변치 않아 악취는 진동했다. 이곳의 가구당 한달 평균 수입은 5만원도 안 된다. 학살의 잔영이 여전히 드리웠지만, 정은 넘쳤다. 인종청소에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서로에게 의지해가며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 여섯도 죽임당해 총구 사라진 것 자체가 행복”
■ 이젠 슬프지 않아=데보라는 남서부 기콩고로 출신이며, 투치족 농부 가족의 7남매 가운데 셋째다. 그는 7살이던 1963년 성탄절 전날, 후투족 여러명이 집으로 몰려와 아버지를 데리고 간 뒤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인종청소가 갓 시작된 94년 4월11일 그의 남편은 바나나 농장에 숨어 있다가 살해당했다. 가차차 법정에서 후투족들이 칼로 남편의 머리를 두동강냈다고 한다. 후투족들은 13일 뒤 투치족들이 모여 있는 교회당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아이 4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데보라는 “죽어 가던 넷째가 ‘엄마 그들이 나의 머리를 쐈어요. 내가 죽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며 흐느꼈다. 나머지 아이 둘은 그 다음날 난자당해 죽었다. 당시 맏이는 13살, 막내는 생후 26개월이었다.
온몸이 찔려 강에 버려진 데보라는 혼자 사는 후투족 노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 노인은 머리에 구더기가 끓던 데보라를 정성껏 치료하고 석달 동안 숨겨줬다. 유일하게 생존한 조카를 자신의 아들처럼 보살피는 데보라는 슬픈 옛일이 생각나지 않느냐는 물음에 “전혀 아니다. 내게 겨눈 총구가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날마다 행복”이라고 대답했다.
■ 시한부 인생=남부 니얀자에서 태어난 가산자이레는 94년 폭도로 돌변한 이웃 사람들에 의해 결혼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명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 만신창이가 돼 삶을 포기하려던 그를 구해준 사람이 두번째 남편이다.
두번째 남편은 자신을 정말로 소중하게 여겨줬다고 한다. 인종청소 당시 잉태된 아이가 가산자이레의 맏딸이다. 그는 남편과 아이 둘을 더 낳으며 다시 희망을 얻었다.
2000년 봄, 갑자기 몸이 약해진 그는 병원에 가서야 인종청소 당시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도 2년 전 에이즈로 죽었다. 그한테서 감염된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은 끝까지 그를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에이즈에 감염된 게 알려지면 이 동네에서도 따돌림당하게 된다. 큰딸 레티샤는 이미 에이즈에 걸린 것 같다.
돈 벌 길이 없는 그에게 이웃들이 음식을 나눠주며 도와준다. 인종청소 때 친척이 다 죽었으니 자신이 죽고 나면 아이들은 누가 돌볼지, 아이들마저 모두 에이즈에 걸리면 어떻게 될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데보라는 가산자이레가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게 됐다. 인터뷰 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들은 떠나기 전 기자에게 “인종청소 당시 우리를 도와준 후투족도 많고, 그러다 동족의 손에 죽은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키갈리/서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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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안효은 기자] 5일 팬들의 곁을 떠난 파바로티는 어릴적 음악보다는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1935년 10월 13일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아마추어 가수이자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난 파바로티는 생전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항상 행복했다. 우리 가족은 형편이 어려웠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해내리라고 믿었다"고 말해왔다.

어린 시절 파바로티는 공부보다는 축구에 더 재능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수인 아버지가 소장한 베냐미노 질리, 티토 스키파, 유시 비욜링, 주세페 디 스테파노 같은 유명 테너들의 음반도 항상 즐겨 들으며 음악에 대한 열정도 이어갔다.

파바로티가 어릴적 함께 노래를 공부한 친구이자 현재 유명 소프라노가 된 마렐라 프레니와 함께 음반을 내고 콘서트 무대에 선 일은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십대에 접어들어 파바로티는 아버지와 함께 교회 성가대와 지역 오페라 코러스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영화에서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가수 마리오 란차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십대 시절 마리오 란차의 영화를 즐겨 봤다. 그의 영화를 본 날이면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란차를 흉내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노래는 그에게 취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20살이 되던 해, 코러스와 함께 팀을 결성해 월레스에서 열린 국제 음악 대회에 나간 파바로티는 일등을 거머쥐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발을 들여놨다. 그의 약혼자였던 아두아 베로니의 격려로 정식 교습을 받기 시작했으며 교습비를 돈으로 지불하기에 형편이 어려워 보험으로 교습비를 대신하기도 했다.

1961년, 파바로티는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고난 뒤 오페라 '라보엠'에 출연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후 연이은 오페라의 성공으로 전세계인에게 이름을 알리며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났다.

그만의 환한 미소와 육중하게 움직이는 모습, 아리아, 손수건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취향 등은 '파바로티스러움'으로 각인됐으며 그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페라로 명성을 얻은 후 파바로티는 1982년 제작된 영화 '죠르지오의 사랑', '리골레토'의 영화 버전에도 출연했으며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는 자서전 '나,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저술했으며 텔레비전 광고에도 등장했다.

이외에도 1992년부터 95년까지 보스니아전이 계속되자 U2의 리드 싱어인 보노와 함께 의료원조를 실시했으며 전쟁이 끝난후에는 모금을 통해 보스니아계 예술인들을 위한 파바로티 음악 센터를 설립해 음악적 후원에도 앞장섰다. 또한 1988년 미국에서 있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며 자선사업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삶만큼이나 구설수도 항상 끊이지 않았다.

모데나에서의 콘서트에서 립싱크를 한 것이 드러나 비난을 받았고, 한 여류 예술가에게서는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탈세 혐의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바로티는 항상 자신의 죄를 부정했고 "나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괴로운 심정을 밝혔다.

말년인 2006년 7월 파바로티는 뉴욕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송별 공연을 준비하던 중 췌장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결국 콘서트를 취소한 채 뉴욕에서 수술을 받았다.

중병을 앓고 있음을 안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행운을 타고난 행복한 사람이다. 이제 그 행운과 행복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병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파바로티는 소수의 학생들을 교습하면서 종교 음악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2008년 발매될 예정이었다.

수술 후 그는 페자로 아드리아해에 인접한 고향 모데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요양했고 전세계 팬들은 그의 쾌유를 빌었다.

이에 최근 그의 두번째 아내 만토바니는 이탈리아 신문 스탐파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사자와 같이 싸우고 있다. 그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바 있으나 파바로티는 결국 6일 타계했다.

그가 타계하는 자리에는 아내 만토바니와 여동생 가브리엘라를 비롯해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세 명의 딸 로렌자, 크리스티나, 기우리아나,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앨리스, 그의 사촌들과 가까운 친지들, 친구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5일 타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 사진=루치아노 파바로티의 'Ti Adro'앨범]

안효은 기자 pandol@mydaily.co.kr



10년전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된 법정 서류 수만장과 사진들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다이애나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교통사고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내달 2일부터 열리는 조사 준비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했습니다.

프랑스 사진가 파브리스 샤세리의 변호인 자격으로 조사에 참여한 장-루이 펠르티에는 '법정에 사건파일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으나 서류가 사라지고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샤세리는 사고 당시 다이애나와 도디 파예드가 탄 차량을 추격하던 파파라치 9명 중 하나였으며 펠르티에는 샤세리가 사고 차량에 갇힌 다이애나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료를 요청했습니다.

[저작권자(c) YTN & Digital YTN.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강성옥 기자
c:http://news.media.daum.net/foreign/others/200709/06/YTN/v18046243.html?_right_TOPIC=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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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송기호 변호사, 법정에서 '한미FTA 문제점' 증언

[프레시안 대전=김하영/기자]

"저는 보통의 통상법이나 세이프가드, 반도체, 덤핑 사건 등 돈 되는 일을 하는 변호사였습니다. 그런데 2005년 WTO 쌀협상이 타결된 당시 한 농민이 여의도에서 합법적 집회를 하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죽었습니다. 왜 죽어야 합니까. 아직도 (경찰이) 죽음의 원인에 대한 조사결과나 재발방지책을 내놓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29일 오후 6시 대전법원청사 316호 법정의 증언대에 선 송기호 변호사는 이와 같이 말했다. 송 변호사는 대전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김상준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한미FTA 반대 시위 피고인들의 재판에 '피고인들이 한미FTA 반대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증언하기 위한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피고인들은 지난해 11월 대전시 중구 충남도청 앞에서 열린 한미FTA저지 총궐기대회에서 불법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됐고, 일부 피고인은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송 변호사는 "전용철 농민이 집회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통상법 연구가에 지나지 않았다"며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는 농민이 경찰 진압에 의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왜 이런 비극적 결과가 발생하는지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이어 "그 이후부터 통상협상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 자영업자 등 이해당사자들이 통상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통상정책을 만들기 위한 국민주권의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이날 '한미FTA 전문가'로 법정에 나섰다. 일종의 감정 증인으로 이 경우 전문가의 견해는 의견서 등의 형식으로 제출되나 최근 구술 중심의 공판중심주의 추세에 따라 직접 법정에서 증언을 했다. 송 변호사는 노트북 컴퓨터와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법정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며 1시간 동안 한미FTA의 문제점에 대해 역설했다.

재판부는 송 변호사의 설명을 주의깊게 들으며 의문점이 있으면 바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방식으로 증언을 청취했고, 100여 명의 방청객들도 숨죽여 송 변호사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등 서류 위주의 재판에서는 볼 수 없는 진지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정부는 통상정책 수립 과정에 이해당사자 참여 기회 주지 않았다"

송 변호사가 보기에 외국과의 통상협정, 특히 한미FTA 체결은 경제체제와 공공질서는 물론 국내법 체계까지도 바뀌게 되는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한미FTA에 의해 직접적 피해를 받는 이해당사자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는 형편이다.

송 변호사는 "한미FTA에 대한 공청회가 무산됐음에도 정부는 바로 협상개시를 선언했고, 이른바 '한미FTA 자문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한미FTA 찬성론자나 한미FTA 체결로 인해 이익을 보는 인사들뿐이었으며, 농민 등 이해당사자들이 협상과정에서 정부에 한미FTA 협상 내용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해도 전부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며 "정부는 한미FTA로 피해를 입게 되는 이해당사자들과 협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송기호 변호사. ⓒ프레시안

송 변호사는 또 "특히 정부는 85억 원 이상을 들여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각종 홍보와 광고를 하면서도, 한미FTA 반대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 제작한 TV광고는 방송금지 처분을 내렸다"며 "방송금지 처분의 부당성을 최근 행정법원에서 인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회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했다. 송 변호사는 "사실상 국회는 협상과정에서 보고를 받기는 하지만 정부가 주도해 마련한 협상 비준안에 대한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역할밖에 못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이해당사자인 국민들이 국회를 통해 한미FTA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송 변호사는 "이렇게 의견 전달에 법률적 제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이해당사자들은 집회 등의 방법으로 직접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물론 직접행동도 법률적 한도 범위 내에서 해야 하지만, 그 집회마저도 경찰이 원천봉쇄를 하는 등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반면 "미국의 국회의원들은 자기 지지기반의 이해관계에 따라 많은 압력을 행사하고 있고, 이해당사자들은 시위를 하는 대신 무역대표부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해서 직접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서 사법부를 대상으로 증언을 하는 만큼, 한미FTA로 인해 우리나라 사법체계에 어떤 충격이 오는지에 대해 강조했다. 재판부도 송 변호사의 지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송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헌법 제119조에 국가가 공익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재산권을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경제 민주화의 규정을 두고 있다"며 "한미FTA와 우리 헌법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헌법 제119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한미FTA, 헌법 경제민주화 조항 공격할 수도"

송 변호사는 특히 "한미FTA가 발효되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데, 국내 사법질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 변호사는 "예를 들어 지역의 중소 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헌법정신에 근거해 국내법상 대형할인마트의 진입을 규제할 수 있으나 한미FTA가 발효되면 미국 투자자가 대형할인마트를 열려 할 때 이를 규제하는 한국 정부가 국제중재소에 제소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또 "미국인 투자자가 국내법에 따라 국내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받고 국내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도 사법 절차에서의 부당성을 제기하며 대법원 판결도 국제중재소에 제소할 수 있게 된다"며 "한미FTA는 경제개방 문제 뿐 아니라, 사회 유지의 근간인 사법질서마저도 흔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재판부도 송 변호사의 지적에 관심을 기울였다. 김상준 부장판사는 국재중재기관 제소시 중재기관의 판결이 국내에서 어떤 강제력을 지니게 될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하는가 하면 "우리 법(대륙법)은 큰 줄기를 정하고 시행령에서 상세한 내용을 다루는 것과 달리 영미(英美)법은 법률에 구체적 내용까지 상세히 다루고 있어 격이 안 맞는 불만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송 변호사는 이에 우리나라는 "외국과의 통상협정을 국내법과 동일한 지위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례에 의해 한미FTA도 국내법과 동일한 법률로 인정되는 데 반해, 미국은 한미FTA 협정 조항을 FTA이행법의 하위조항으로 하기 때문에 미국 국내법과 동일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 "합당한 절차 마련해 조화 이루는 방법 필요하다"

송 변호사는 마지막으로 "전용철 농민의 죽음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이해당사자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참여할 수 있는 통상절차법 등의 법적 틀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며 증언을 마쳤다.

재판부는 "장시간 증언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한미FTA를 보는 시각은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에 이익이 되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절차이며 합당한 절차를 만들어 조화를 이뤄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며 재판을 마쳤다.

한편 이날 재판의 6명의 피고인 중 김모 피고인은 송 변호사의 증언을 청취한 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증인으로 신청하고 싶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김 씨는 "김 본부장을 위증을 하면 처벌 받는 재판정에 불러 그동안 한 거짓말을 다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김 본부장은 이번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어 재판부가 김 본부장을 증인으로 채택할지는 미지수다.

대전=김하영/기자 (richkh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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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공격적 선교행태 반성

기독교계 성찰론 봇물
타종교·타문화 무시행태
국민들 우려 귀 기울여야

한국 교회는 아프간 피랍 사건을 계기로 뼈아픈 자기성찰을 요구받게 됐다.

사건 이후 개신교회는 성난 누리꾼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성토를 당했다. 타 종교와 타 문화를 무시한, 무분별한 선교 행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까지 이를 “신도들로부터 헌금을 기대하고 사진 찍기에 불과한 활동을 하는 ‘캠코더 선교’”라고 비꼬았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듯, 인질 석방 발표 다음날인 29일 교계에서는 일방적 선교를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봇물을 이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성명을 내어 “선교의 전면 중지 합의를 한국 교회가 존중함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보수적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성명을 발표해 “분쟁지역 선교에 신중을 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인 김명혁 목사(강변교회)도 최근 “이번 사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라며 한국 교회의 각성을 촉구한 바 있다.

국외선교 방식을 재검토하자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기총, 세계선교협의회 대표들은 30일 오전 7시 한기총 사무실에서 만나 ‘아프간 사태 이후-한국 교회의 역할’을 모색할 대책회의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교회 연합기구들의 노력이 실제 한국 교회의 국외선교 패턴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피살된 이후 무분별한 국외선교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지만, 선교의 행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세계선교협의회는 현재 1만6천여명으로 세계 2위인 해외선교사 수를 2030년까지 10만명으로 늘리자는 비전을 아직도 홈페이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사랑의 봉사단’ 대표인 황성주 박사가 제시한 ‘선교사 100만명 파견’과 순복음교회의 10만 선교사 파송, 명성교회와 온누리교회의 1만명씩 선교사 파견 비전 등이 담겼다. 중앙 연합기구의 ‘말’과 달리, 개별 단체, 교회 차원에선 기존의 공격적인 선교 행태가 쉽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와중에 기존 선교 행태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확인된 점도 주목된다.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가 최근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85.3%가 국외 봉사 선교활동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29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국민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지켜볼 일이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미국 좆은 파병 ‘혹독한 대가’…평화외교 대전환을

[아프간 인질사태가 남긴 과제] 파병정책 전면 재검토


‘테러와의 전쟁’ 동참이 끝내 화 불러
파병동맹 미국 “협상불가” 도움 외면
아프간·이라크 평화 근본적 성찰 절실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태는 한-미 동맹의 성격 및 전망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일부에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에서 한-미 공조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한국군 동의·다산 부대의 아프간 파병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정부는 아프간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구호 및 진료 활동과 평화재건을 지원하는 국제적 연대에 동참해 세계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부대를 파병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현지에서 전투참여 없이 동맹군에 대한 의료·공병임무 지원과 함께 현지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구호활동을 펼쳐왔다. 동의부대는 2002년 9월 파병 이래 24만여명의 환자 진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재건·의료지원단이라는 형식을 떠나, 파병 자체가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 주도의 대테러전에 군사적으로 동참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반도 방위를 위한 상호협조 차원에서 비롯된 한-미 동맹의 외연을 미국 주도의 대테러전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인질 사태에서도 탈레반은 한국군을 대테러 동맹군의 일원으로 규정하고 철군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는 29일 ‘대테러전 참전의 혹독한 대가와 교훈’이라는 논평을 냈다. 논평은 “아프간의 갈등과 분쟁을 더욱 조장하는 전쟁에 한국이 무책임하게 참전한 결과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이번 사태가 똑똑히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또 “아프간과 이라크 평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대테러전에 동참했던 파병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의도된 정보왜곡은 정부가 철저히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피랍사태 기간에 미국이 ‘협상 불가’를 고수하며 인질 석방을 바라는 한국 정부와 가족들의 애타는 심경을 외면했다는 비판론도 있다. 미국이 이번 인질 석방 과정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한국 정부가 탈레반 쪽과 직접 대면협상을 하고 이슬람권 국가들에 대해 전방위적 외교를 펼친 것이 큰 효과를 본 것은 분명하다. 결국 한-미 동맹에 묶인 한국의 기존 외교가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현장교훈을 얻은 셈이다. 반면 보수세력 사이에서는 한국 정부가 탈레반과 대면협상을 하고 일찌감치 철군을 못박아 한-미 동맹에 균열이 생기게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는 앞으로 이라크 자이툰부대 파병 연장 및 아프간 지방재건팀(PRT) 파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둘 다 미국의 요구로 한-미 동맹 차원에서 검토되는 사안이다. 김형기 국방부 홍보관리관은 아프간 지방재건팀 파견 여부와 관련해 “피아르티 참여는 이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논의된 부분”이라며 “앞으로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서 검토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과 한-미 동맹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당장 이 두 사안의 진행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강대국 중심 외교…지구촌 지역 전문가가 없다

[아프간 인질사태가 남긴 과제] 이슬람권 이해 전환점 계기


아프간 아랍어 안쓰는데
사태 초기 아랍어교수 찾아
현지 네트워크 없어 고전

한국인 인질 사태가 벌어지자, 정부는 9일 뒤에야 이른바 ‘전문가’를 보냈다. 아랍어 교수였다. 하지만 아프간에선 아랍어가 통용되지 않는다. 파슈툰어와 다리어가 쓰인다. 정부는 얼마 뒤 다른 전문가를 찾느라 허둥댔다. 현지에 한 명의 기자도 파견하지 못하고 사건의 종말을 봐야 했던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번 인질사태는 주요국 이외 지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냈다. 라마단 등 이슬람권에 대한 이해와 사우디아라비아·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은 인질 석방에 크게 기여했다. 그만큼 특정 지역에 대한 정부·학계·언론계 등 각계 전문가의 중요성은 다시 확인됐다.

하지만 대외정책의 최일선인 외교부만 봐도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중동전문가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탈레반과의 협상을 꺼리는 아프간 정부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고 협상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아프리카·중남미 등 다른 제3세계 전문가도 찾기 어렵다. 아프리카의 한 한국 대사는 “아프리카 국가로 배치될까봐 프랑스어 구사 능력을 드러내길 꺼린다”고 털어놨다.

세계화 시대라고 하지만 주요국을 빼면 각 지역 전문가가 없기는 학계와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학계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들이 즐비하지만, 국립대학교에는 아랍어과가 개설된 곳이 한 곳도 없다. 이른바 제3세계 전문가는 일자리를 얻기도, 학술진흥재단 등의 지원도 받기 어려워 연구 자체를 꺼린다.

언론계도 아랍권 등 특수지역의 현지어를 이해하는 전문가가 없어, 서방 언론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나 독일 관련 기사조차 영·미 언론 보도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 극소수 강대국 중심의 사회적 풍토 속에서 정책적 뒷받침까지 없다 보니까 기타 지역의 전문가를 키우지 못한 것이다.

김계동 국제지역연구소장은 “우리 사회는 일부 지역을 빼면 지역전문가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며 “지금까지는 우리 사회의 경제·사회적 수준이 제3세계까지 신경쓸 수준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대학 등에서 전문가를 키워낼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동정치 전문가인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중동이나 아프간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의 전문가조차 활용하지 못해 초기 대응에 혼선을 빚었다”며 “고시 채용 대신 각 지역별로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외교관으로 선발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비슷한 사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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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戰키스는 우연하고 뜨거웠지"… 저 흑백 사진 속 남자가 바로 나요
80세 맥더피氏 거짓말탐지기 등 검증 '진짜' 판명

62년 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전을 맞던 날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서 간호사와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눈 장면을 촬영한 사진의 주인공 신원이 마침내 밝혀졌다.

당시 잡지 라이프에 '승리의 키스'라는 제목으로 게재돼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사진의 남녀 주인공 가운데 여자 쪽의 신원은 79년 일찌감치 확인됐으나 남자의 경우 10여명이 본인이라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베일에 싸여 왔다.

ABC 방송은 27일 1945년 8월14일(현지시간) 종전 당시 격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던 주인공이 올해 80세의 글렌 맥더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맥더피에 대해 거짓말 탐지기와 다른 첨단 장비를 동원한 수차례에 걸친 검사 결과 그가 진짜 타임 스퀘어의 수병일 확률이 거의 100%라고 소개했다.

맥더피는 ABC 방송의 방문 취재에서 사진에 찍힐 때 불과 18세의 어린 수병이었으며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캐너폴리스 해군기지에서 막 뉴욕 브루클린에 도착한 상태에서 종전 소식을 들었다고 술회했다.



맥더피는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왔을 때 한 여성이 '당신 때문에 너무 기쁘다'고 말해 무슨 일이 발생했느냐 되묻자 '전쟁이 이미 끝났다"고 전해줬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젠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기분으로 타임 스퀘어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가던 도중 우연히 부딪힌 간호사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눈 것으로 기억했다.

맥더피는 키스를 하는 순간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고 고개를 들어 보니 사진기자였다고 전했다.

이러한 맥더피의 진술을 거짓말 탐지기 등으로 검증한 전문가 리 베일리는 "검사에서 그가 어떠한 허위 사실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3주전 법의학자로도 유명한 안면식별 전문가 로이스 깁슨도 맥더피를 타임 스퀘어로 초대해 대형 베개를 상대로 62년 전 키스 포즈의 재현을 부탁했다.

깁슨은 첨단 분석기법으로 맥더피의 지금과 과거의 자세를 대조해 그가 분명히 62년 전의 수병임을 확신했다. 그는 맥더피의 모든 신체의 부위 길이를 측정한 뒤 사진 속 수병의 팔과 손, 귀 등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거쳤다.

사진의 여주인공은 금년 89세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이디스 셰인으로 라이프 잡지 표지에 나간 사진을 보자마자 자신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27세의 간호사였던 셰인은 부끄러운 마음에 '비밀'을 마음 속에 간직해 오다가 79년 용기를 내서 사진 촬영자인 앨프레도 에이젠스태트에게 편지를 보내 사실을 털어놨다. 에이젠스태트는 즉시 캘리포니아로 날아 가 이디스가 간호사인 사실을 확인했다.

이디스는 "키스를 하는 6~7초 동안 우린 무아지경에 있었다. 눈을 감고 입을 맞췄으며 그의 이름조차 물어 보지도 못했다"며 "그가 전쟁에서 나와 국가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키스에 응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다만 여러 검사 결과와 정황 증거가 있음에도 사진을 찍은 에이젠스태트는 아직 맥더피를 '수병'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맥더피는 현재 폐암으로 투병 중이다.

이정흔 기자 viva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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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22명 인질사태 해결의 열쇠는?
23명이 인질로 잡혀 1명은 살해되고 22명은 열흘이 넘은 인질구조 석방의 문제는
심각한 외교적 문제와 각국의 이해득실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와의 문제는 수감자 석방이라는 직접적인 문제이고 우리 인질의
석방과 탈레반 수감자와의 문제는 간접적인 문제로 얽혀져 있다.
아프간과 미국과의 관계는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보다 더 심각하다고 하겠다.
더운 날씨에 건강이 문제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부의 대책 중에 최우선은 인질의 건강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
의약품은 물론 식품과 의복 그리고 위생적인 문제에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호소를 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하면서 협상을 지속 유지해야 한다.
인질석방은 미국의 협조가 없는 한 앞으로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탈레반 측의 협상 창구도 문제이지만 이미 국제적인 문제로 된 이상 탈레반,
아프간정부, 미국 등은 실리를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협상의 중심을 외교에 두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인데 미국의 태도변화가 쉽지 많은
아닌 것 같다.
우선 미국은 국가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어떤 세력과도 협상은 없다는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아프간에 주둔을 하고 그 주도권을 미국이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외교노력이 쉽지 않다는 것이고 탈레반 측의 여러 협상 창구에 터져 나오는 내용이 일관된 것이 아닌 것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남북문제인 비핵화와 6자회담에 대하여 미국과 일부 이견(異見)이 있다는 것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실리외교는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정부가 더 고심하고 미국을 설득하는 길만이 22명 인질석방의 시기를 당길 수 있다는 전제하에 정부는 이 문제에 접근해야할 것이다.
출처:http://blog.daum.net/victokorea 빅토코리아